당나라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환관 세력 제거에 나섰다가 쿠데타로 실각하고 좌천당하자, 이 일을 빗대어 '임강 땅의 고라니(임강지미·臨江之麋)'를 지었다.
"임강의 어떤 사람이 사냥하여 고라니를 잡고는 집안에 기르고자 하였다. 집 안에 들어서니 뭇 개들이 침을 흘리며 꼬리를 세우고서 몰려왔다. 주인은 화를 내며 그들을 겁주었다. 이때부터 고라니를 안고 개들에게 다가가 익숙하도록 만들고, 건드리지 못하게 하면서 조금씩 같이 놀게 하였다. 오래되자 개들은 모두 주인의 뜻을 따랐다. 고라니는 점점 자라자 자신이 고라니인 것을 잊고 개들이 자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여기어, 맞서고 나뒹굴며 더욱더 가깝게 지냈다. 개들은 주인을 겁내 고라니와 함께 비위를 맞추며 잘 지냈다. 그러나 수시로 입맛을 다셨다. 삼 년이 지나 고라니는 문을 나섰는데 밖의 길가에 개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친구로 여겨 달려가 함께 장난하고자 하였다. 밖의 개들이 고라니를 보고 좋아서 흥분하며 모여들어, 같이 죽여 먹어치우니 그 흔적이 길에 낭자했다. 그러나 고라니는 죽으면서도 그 까닭을 깨닫지 못하였다."
섬뜩한 이 우언을 유종원 처지에서 읽는다면, 주인은 자신을 감쌌던 당나라 황제, 고라니는 자신, 개는 조정 안팎의 환관과 정적들로 보인다. 그런데 한국인으로서 작금의 흉흉한 국제 정세를 생각하며 읽으면 생각할 여지가 많은 이야기 같다. 요즘을 구한말과 비교하는 이들이 많아선지 심사는 더 복잡해진다. 생존을 넘어 강국으로 올라서려면 무엇부터 검토해야 하는가.
중화민국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안중근 의사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을 정도로 조선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 망국 사략', '조선 멸망의 원인' 등의 글에서는 이웃 나라의 처지를 슬퍼하는 동시에 조선이 중국을 애도할 날도 조만간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읽어보면 제목은 조선이지만, 사실은 중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쓴 글인데 그 안에 이런 말이 있다.
"온 세상이 바삐 돌아다니며 서로 알리기를 일본인들이 한국을 망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어찌 한국을 망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한국이 망한 것은 한국 황제가 망하게 한 것이요, 한국 인민이 망하게 한 것이다. 일본이 타국을 망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만이 문제겠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 있더라도 어쩌겠는가?"
이 글을 읽다가 절로 한용운 선생의 말씀이 생각났다.
"망국의 한이 크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자는 언제든지 그 한을 풀기가 어려운 것이다. 불행한 경지를 만나면 흔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 강자를 원망하고 사회를 저주하고 천지를 원망한다. 얼핏 보면 영웅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를 약하게 한 것은 다른 강자가 아니라 자기며, 자기를 불행케 한 것은 사회나 천지나 시대가 아니라 자기다. 망국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제이 제삼의 정복국이 다시 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불행도, 자기 행복도 타에 의하여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련하기도 하지만 가증스럽기가 더할 수 없다.(심우장만필, 1936)"
인걸들의 안목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는가. 조지 워싱턴은 1796년 이런 고별사를 남겼다.
"특정 국가들에 대해서 지속적이고 완고한 혐오감을 갖는 한편, 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애착심을 갖는 태도를 배제하여야 한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끊임없는 혐오감이나 상습적인 호감을 갖는 국가는 어느 면에서 볼 때 노예국가나 다름없다."
감정에 휘둘려 국제 문제를 처리하는 태도는 매국 행위와 진배없다. 과학적 사고와 상무 정신이 우선해야 한다. 일체의 우상을 파기하고 차분하고 냉철하게 전략을 검토해야 할 때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