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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통념 거부한 두 남녀의 천생연분

입력
2021.12.21 04:30
22면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展’ 특집 <10>

1913년 볼쇼이 극장에서 발레 '황금수탉' 무대 디자인을 작업중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미하일 라리오노프. Wikimedia commons 제공

1913년 볼쇼이 극장에서 발레 '황금수탉' 무대 디자인을 작업중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미하일 라리오노프. Wikimedia commons 제공


천생연분(天生緣分).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는 말로서 나무랄 데 없이 꼭 맞는 한 쌍을 일컫는다. 시기와 질투, 음해가 난무하는 미술사를 통틀어 이러한 단어가 어울리는 관계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관계는 평생을 함께해오며 서로를 지지해주었다는 점에서 천생연분이라 부르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터번을 쓴 자화상(1907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터번을 쓴 자화상(1907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두 사람은 1901년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서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다. 원래 조각을 배우던 곤차로바를 회화의 길로 이끈 이가 라리오노프이다. 러시아의 인상파로 이름을 날리던 콘스탄틴 코로빈에게서 사사하고 있던 만큼 라리오노프의 색채감각은 탁월하였으며 그는 곤차로바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색채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 3일에 걸친 긴 설득 끝에 곤차로바는 라리오노프를 따라 회화로 전공을 변경하였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동반자 관계가 시작되었다.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노란 백합을 든 자화상(1907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노란 백합을 든 자화상(1907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1903년 두 사람은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은 단칸방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기성세대의 부르주아적 가부장 질서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결혼은 하지 않았다. 젊음의 패기와 이상주의로 무장한 채 무모할 정도로 과감했던 이 젊은이들은 마치 자신들의 파격을 기성 미술계와 사회가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듯했다. 라리오노프는 혁명에 동조하는 과격한 언행을 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했고, 곤차로바는 풍기문란과 신성모독으로 전시가 취소되고 작품이 압수될 정도였다. 얼핏 미래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무모한 도전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귀족 가문 출신 딸의 ‘비행’과 고생을 보다 못한 곤차로바의 부모가 두 사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라리오노프의 그림은 곤차로바 가문의 인맥을 통해 판매될 수 있었고, 그들은 곧 모스크바 중심가의 넓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아파트의 소유주가 곤차로바 가문이었음은 딱히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밝은 햇빛 속의 공작(1911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밝은 햇빛 속의 공작(1911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두 사람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기성 미술계에 불만을 지닌 반항적인 젊은 미술인들과 함께 ‘다이아몬드 잭’이라는 전시를 기획하였다. 전시 제목은 미술이 지닌 우아하고 섬세한 고급문화로서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충격을 주기 위하여 뒷골목의 도박장이 연상되는 불량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전시 제목이 ‘카지노★바카라’ 또는 ‘777룰렛게임’ 정도의 느낌이었으리라. 이 전시는 현재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알려진 혁신적 흐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는 ‘다이아몬드 잭’이 점차 처음의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어 가자 이를 박차고 나와 기성 미술에 대한 역설적 조롱의 의미를 지닌 ‘당나귀 꼬리’라는 전시를 조직하는 등 파격적 행보를 이어 간다. 이후 이들은 유럽에 러시아의 현대예술을 알리기 위해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조직한 ‘러시아 시즌’에 무대미술가로서 참여해 프랑스로 출국했으나 러시아 혁명의 발발로 인하여 돌아오지 못하고 타지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황소의 머리(1913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황소의 머리(1913년 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제공


회화에 있어서 곤차로바는 라리오노프보다 후배였기에 초기에는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곤차로바의 초기작이 많이 남아 있는 러시아에서의 그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라리오노프에 비하여 그동안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남겨진 그들의 작품까지 총망라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라리오노프가 곤차로바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동등한 관계였다는 점이 새로이 강조되고 있다.

파리에서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채 각자 애인을 두는 등 자유로운 연애를 하였으나 항상 생활과 작업을 함께하며 서로의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75세가 되던 때까지도 함께 생활은 하지만 결혼하지 않으며 기성 제도와 문화에 저항하는 삶을 택했다. 그러나 유산 상속 문제로 결국 1956년 어쩔 수 없이 혼인신고를 하게 된다. 저항에도 꿈쩍 않는 굳건한 사회적 제도 앞에서 그들의 자유와 신념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확실한 것은 라리오노프의 삶과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곤차로바 없이는 불가능하며, 곤차로바의 삶과 예술에 관해서도 라리오노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는 점이다.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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