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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포도송이를 품은 독수리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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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얼마 전 한 시음회에 참석했다. 자타 공인 세계 최고의 리슬링 와인을 만드는 독일의 와인 메이커 에곤 뮐러(Egon Müller) 시음회였다. 에곤 뮐러 레이블이 붙은 와인 병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독일에는 우수와인생산자협회(VDP, Verband Deutscher Prädikatsweingüter)라는 단체가 있다. 가슴에 포도송이를 품은 독수리가 이들의 상징이다. 병목과 레이블에 이 마크를 인쇄한다. 에곤 뮐러 역시 VDP 회원이다.
에곤 뮐러 와인 병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데 레이블과 병목에 인쇄된 마크가 여타 VDP 와인과 달랐다. 병목에 에곤 뮐러의 독특한 문장만 있을 뿐 독수리 마크가 보이지 않았다. 레이블 표기도 달랐다. 보통 독일 최고급 와인의 레이블에는 마을 이름에 ‘er’를 붙이고 포도밭 이름을 연이어 적는다. 예를 들면 ‘Wehlener Sonnenuhr’는 ‘벨렌 마을의 존넨우어 포도밭 와인’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에곤 뮐러 레이블에는 마을 이름이 없었다. ‘샤츠호프베르크 포도밭 와인’이라는 뜻으로 ‘er’가 덧붙은 이름 ‘Scharzhofberger’만 달랑 표기돼 있었다. 에곤 뮐러의 셀러에서 직접 와인을 가져온 와사향(와인을 사랑하는 향기로운 사람들 동호회)의 ‘와인지기’ 님과 시음회를 주관한 ‘Felona’ 님에게 까닭을 물었다. 이들에 따르면, 최근에는 협회 로고 대신 자신들만의 표지를 사용하는 생산자들도 있다. 에곤 뮐러처럼 특등급 포도밭의 와인일 경우 마을 이름을 빼고 밭 이름만 표기하기도 한단다.
자기밭에서 나온 포도로만... 독일 민간 와인협회의 깐깐한 기준
VDP는 1910년 설립됐다. 독일 13개 와인 산지의 200여 와이너리가 가입돼 있다.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공동으로 품질을 보장하고 홍보를 하려는 목적에서 협회가 설립됐다. 이 협회는 법적 공식기관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 있는 와이너리들의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가입이 까다롭다.
원산지와 품종의 특성이 와인에 반영될 수 있도록 자기 소유의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 또 포도밭 전체 면적의 70% 이상은 리슬링이나 슈페터부르군더(피노누아) 같은 독일 전통 품종을 심어 재배해야 한다. 현재 VDP 와인은 독일 전체 와인의 약 4%밖에 안 된다. 그만큼 품질이 보장된다.
협회에서는 1971년 제정한 독일와인법으로는 커버하지 못하는 중요한 기준을 만들었다. 바로 ‘원산지’ 개념의 등급 체계이다. 독일 와인법에서는 포도의 ‘당도’를 기준으로 최고급 와인의 등급을 가른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프레디카츠바인(Prädikatswein) 등급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등급 기준을 당도로 삼은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독일의 기후 조건에서는 포도의 당도가 쉽게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수저계급' 체계와 다른 독일 와인
생각해보면,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이나 부르고뉴에서는 샤토나 포도밭에 고릿적 부여한 등급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덕분에 포도 품질과 상관없이 와인 등급은 이미 정해져 있다. 물론 이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정해진 등급을 넘을 수도 없다. 적어도 ‘와인 계급’에 있어서 프랑스는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반면 독일의 등급 체계는 수확한 포도의 성숙도를 검사해 등급을 정한 것이다. 노력한 만큼 등급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그런데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원산지를 기준으로 등급 체계를 세운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등급 기준과 체계가 다르다 보니, 외국인들이 보았을 때는 독일 와인의 기준이 외려 혼란스러웠다. 상품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는 굉장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VDP에서 새로운 등급 체계를 만든 까닭이 여기에 있다.
VDP는 협회 회원들의 포도밭만이라도 프랑스 부르고뉴처럼 테루아르 개념을 적용해 등급을 구분했다. 포도밭 분류 작업은 약 10년 동안 진행되어 2012년 빈티지부터 다음과 같은 새로운 등급 체계를 적용했다.
Grosse Lage(그로세 라게) |
Grand Cru급 |
약 5% |
---|---|---|
Erste Lage(에르스테 라게) |
Premier Cru급 |
약 10% |
Ortswein(오르츠바인) |
Village급 |
|
Gutswein(구츠바인) |
Bourgogne regional급 |
온난화 영향받는 와인
VDP는 또 다른 보완책도 마련했다. 바로 ‘고급 드라이 와인 등급’이다. 앞서 언급했듯 독일와인법에서는 등급 기준을 당도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독일의 드라이 와인은 품질이 좋은 데도 불구하고 스위트 와인이 아닌 탓에 최고 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최근 통계를 보면, 독일에서 생산되는 와인 가운데 약 35%는 레드와인과 로제와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이트와인이 90%였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레드와인과 로제와인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특히 슈페트부르군더로 만든 레드와인의 품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드라이 와인의 비율 역시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실상은 이러한데도 많은 사람이 독일 와인은 달다고만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필자 역시 편견이 있었다. 독일 와인은 죄다 달뿐더러 화이트와인 일색이라고 말이다. 이런 편견이 왜 생겼을까.
독일에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진 와인이 있다. 한때는 독일 수출 와인의 3분의 1을 차지하기도 한 ‘블루넌(Blue nun)’이다. 블루넌은 독일 라인헤센 지역에서 탄생한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다.
이 와인의 이름은 원래 립프라우밀히(Liebfraumilch)였다. ‘성모의 모유(Milk of Our Lady)’라는 뜻으로 리슬링, 질바너, 뮐러 트루가우 등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든다. 향긋하고 상큼하며 달콤한 데다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많았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쉽도록 ‘블루넌’으로 이름을 바꿔 영국에 수출하면서부터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독일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와인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Blue Nun’ 상표를 단 카베르네소비뇽, 돈펠더, 메를로, 리슬링, 아이스 와인, 스파클링 와인까지 생산될 만큼 인기 있다.
독일 와인은 다 달다고?
그런데 블루넌은 독일 와인 산업에 역효과도 가져왔다. 블루넌이 신드롬을 일으키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독일 와인은 값싸고 달콤한 화이트와인 일색이라는 편견이 생긴 것이다. 마치 보졸레 지역에 수준급 와인이 여럿 생산되지만, 보졸레 누보의 인기 탓에 보졸레 와인은 맛이 가볍고 저렴하다고 인식되듯 말이다.
독일에도 수준급 와인은 많다. 19세기 말 세계 최대의 와인 수입국이었던 영국의 자료를 보면, 와인으로 콧대가 높은 프랑스 와인을 젖히고 독일 와인이 최고가로 거래됐다. 부르고뉴 그랑크뤼 와인인 로마네(콩티)와 샹베르탱은 130파운드, 클로 드 부조는 150파운드인데 독일 와인은 200파운드였다. 당시엔 자연에서 단맛을 얻기 어려웠다. 단맛은 고귀한 맛으로 여겨져 독일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당도 높은 와인은 비쌀 수밖에.
독일의 고급 스위트 와인은 대부분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다. 리슬링은 독일처럼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인 북위 50도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날씨가 서늘한 탓에 포도가 서서히 익으면서 향미가 응축돼 높은 산도와 당도가 조화를 이룬다. 그러니 이런 포도로 만든 와인을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 와인은 에곤 뮐러가 리슬링 품종으로 빚은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BA, Trockenbeerenauslese)다.
아무튼, 독일에는 블루넌 말고도 수준급 와인이 많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더 나아가 스위트 와인뿐만 아니라 드라이 와인도 많다는 점도 말이다. 달콤한 와인은 메인 요리보다는 주로 디저트용으로 소비되는 데다가, 소비자들이 갈수록 달지 않은 와인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2000년 빈티지부터 드라이 와인을 나타내는 용어를 추가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기존에는 드라이 와인의 맛을 ‘트로켄(드라이)’과 ‘할프트로켄(세미드라이)’으로 나누어 표기했다. 이 규정을 보완해 ‘클래식(Classic)’과 ‘젤렉치옹(Selektion)’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클래식은 규정을 지켜 만든 고급 세미드라이 와인, 젤렉치옹은 규정이 더 엄격한 최고급 드라이 와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전통 용어에 익숙한 탓인지 새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한편 라인가우 지역에서는 1999년 빈티지부터 이 지역에서만 사용하던 최고 등급이 있었다. 에르스테스 게벡스(Erstes Gewächs)로 1등급을 뜻하며 오직 리슬링과 슈페트부르군더로 만든 드라이 와인에만 부여됐다. 2018년 빈티지부터는 ‘알쥐쥐(RGG, Rhg Großes Gewächs)’로 대체했다.
특등급 독일 드라이 와인, ‘GG’
이러한 노력은 VDP의 최고급 드라인 와인 등급 제정으로 이어졌다. 흔히 ‘쥐쥐(GG)’라고 부르는, 그로세스 게벡스(Großes Gewächs)다. 특등급 포도밭 그로세 라게(Grosse Lage)에서 생산하는 최고급 드라이 와인을 뜻한다. GG 와인은 지역에 따라 리슬링, 슈페트부르군더뿐만 아니라 다양한 청포도와 적포도 품종으로 빚는다.
요컨대, 독일 우수와인생산자협회는 프랑스 부르고뉴처럼 포도밭을 테루아르에 따라 등급화시켰다. 또 드라이 와인을 널리 알리기 위해 최고급 드라인 와인 등급을 만들었다. 독일 와인을 고를 때, 병목에 VDP의 상징인 포도송이를 품은 독수리 로고가 있으면 품질이 담보되는 고급 와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에 GG 표시까지 있으면 특등급 포도밭 포도로 만든 드라이 와인이다.
몇 해 전 독일을 여행하면서 에곤 뮐러의 포도밭 샤츠호프베르크에도 들렀다. 아쉽게도 와인은 맛볼 수 없었기에 포도밭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에곤 뮐러의 집을 바라보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에곤 뮐러의 셀러에서 직접 가져온 와인을 마실 기회가 생기다니! 시음 와인을 받아놓고는 시각, 후각, 미각 아니 여섯 감각을 모두 동원해 와인을 ‘흡수’했다. 향과 맛의 다채로움, 깊이, 균형, 여운. 그 어느 면에서도 결점을 찾아볼 수 없는 와인이었다. 그 맛은 신들의 음료 넥타르에 비유한 앞선 애호가들의 평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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