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평양의대 학장, 동생은 서울대 교수…근현대사 속 특별한 형제들

입력
2021.12.16 15:52
수정
2021.12.16 16:2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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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교 설립을 주도한 정두현(1888~?)과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를 지낸 정광현(1902~1980)은 평양 유지의 장남과 3남으로 태어났다. 두 형제는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각각 도쿄제국대학에서 공부한 난사람이었다. 각각 평양과 경성에서 광복과 분단을 맞았고,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정두현은 평양의학대학 학장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에 올랐고, 정광현은 친족상속법의 기초를 마련한 공로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등재됐다.

그러나 정두현이 평양의학대학 학장을 지내던 1948년 자필로 쓴 이력서에는 동생이 등장하지 않는다. 친척 관계를 적는 공간에는 차남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만 적혀 있다. 두 형제의 이야기를 발굴한 정종현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는 이달 출간한 저서 ‘특별한 형제들’에 사연을 소개하면서 정광현이 생전에 남긴 기록들에서도 형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적대적 진영에서 살아가는 형제에게 서로의 존재는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위협이었기에 감출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정두현이 평양의학대학 학장을 지내던 1948년 10월 자필로 작성한 이력서. 가족 관계에 남한에서 성공한 동생의 이름이 없다. 정종현 교수는 당시 북한에서는 공직자와 노동당원 등에게 자서전과 이력서를 요구했다고 설명한다. 휴머니스트 제공

정두현이 평양의학대학 학장을 지내던 1948년 10월 자필로 작성한 이력서. 가족 관계에 남한에서 성공한 동생의 이름이 없다. 정종현 교수는 당시 북한에서는 공직자와 노동당원 등에게 자서전과 이력서를 요구했다고 설명한다. 휴머니스트 제공


정종현 교수는 ‘특별한 형제들’에서 정두현과 정광현을 비롯해 광복과 분단이라는 격변을 헤쳐 나갔던 형제 13쌍의 이야기를 추적한다. 혈연으로 맺어져 생애의 일부분을 공유했지만 역사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때로는 비슷한, 때로는 정반대의 선택지를 고른 형제들의 이야기다. 혁명가부터 기업인, 밀정, 매국노에 이르기까지 형제들이 선택했던 삶을 돌아보되 ‘친일’ ‘항일’ ‘좌익’ ‘우익’ 등 이분법적 평가와는 거리를 둔다. 사료를 기반으로 인물들의 인생을 다면적으로 조명한다. 근현대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책에서는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다양한 삶이 펼쳐진다. 미군정 아래서 검찰총장을 역임한 이인(1896~1979)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원이었던 이철(1917~1950) 형제 역시 그렇다. 1950년 2월 23일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형사들이 제헌의회 국회의원이었던 이인의 집에 들이닥쳐 장남 이옥을 체포한다. 이철도 자택에서 체포된다. 이철이 남로당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를 주도하면서 이옥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좌익 소탕을 주도했던 검찰총장의 집이 남로당 근거지였던 셈이다.


특별한 형제들. 정종현 지음ㆍ휴머니스트 발행ㆍ320쪽ㆍ1만8,000원

특별한 형제들. 정종현 지음ㆍ휴머니스트 발행ㆍ320쪽ㆍ1만8,000원


정 교수는 이씨 형제의 사연을 시대의 장난, 민족의 비극으로 표현한다. 이에 따르면 이인은 일제 강점기에도 지조를 지키며 사상사건이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변호한 인물이다. 1979년 세상을 떠나면서는 모든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했다. 이철 역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출신으로 사회주의에서 민족의 길을 찾았던 양심적 인텔리로 묘사된다. 가족들은 체포된 이철을 대신해 탈당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한다. 정 부교수는 형이 동생을 잡아 죽여야 할 놈으로 몰아붙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검사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라고 사료의 행간을 상상한다.

정 교수는 책의 서두에서 프랑스혁명 시절 ‘모든 인간이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형제’라는 기독교적 가르침이 ‘박애’라는 보편적 가르침으로 바뀌었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지적한다. 형제애(자매애)는 곧 민족과 국가, 사회 등 공동체의 연대를 뜻한다. 형제애는 차별과 배제, 혐오와 폭력를 극복하는 힘이다. 저자가 형제들의 이야기를 불러내는 이유, 오늘날 한국에 형제애를 복원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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