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공자님 말씀' 하면 꼰대? 배움에는 끝이 없다

입력
2021.12.18 10:00
수정
2021.12.23 19:09

<81> 제노(齊魯) 문화 ③ 취푸

허난성 루이의 명도궁 문예정에 공자(왼쪽)가 노자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최종명

허난성 루이의 명도궁 문예정에 공자(왼쪽)가 노자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최종명

공자가 노자를 여러 번 방문했다. 예(禮)에 대해 물었고 무위(無爲)라 답했다. ‘사기’ ‘좌전’ ‘공자가어’ 등이 기록하고 있다. 노자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루이(鹿邑)에 가면 도관인 명도궁(明道宮)에 문예정(問禮亭)이 있다. 공자가 당시 최고의 석학인 노자를 찾아 문답하는 장면이 조각돼 있다. 오른손 검지를 곧추세우고 설명하는 노자다. 셋만 모이면 반드시 배울만한 스승이 있다고 공자가 말했다. 전국을 주유하던 공자가 노자를 만난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일곱 살짜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동한 시대의 묘실 석각. 중국 CCTV 캡처.

공자가 노자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동한 시대의 묘실 석각. 중국 CCTV 캡처.

7세의 신동 항탁을 만나 이치를 깨우친 공자가 남긴 말이 있다. 어린 후학에게 배울만한 도리가 있으니 두려워할 만하다는 후생가외(後生可畏) 미담이다. 국보급 유물을 소개하는 중국 CCTV 역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산둥성 자샹(嘉祥)에서 출토된 동한 시대 묘실 석각에 대해 소개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는 장면을 새긴 석각이다. 유가를 숭상한 관리나 유지가 많이 사는 땅이다.

두 석학의 상봉이 드라마 같다고 여긴 까닭에 많은 유물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두 석학 사이에 꼬마가 등장한다. 바로 항탁이다. 노소를 막론하고 배우고 익힌 공자의 땅이다. 또한 석각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등장한다. 공자 어깨 부위에 앉아 있다. 뜬금없는데 이유가 있었다.

공자의 고향인 취푸의 '궐리' 패방. Ⓒ최종명

공자의 고향인 취푸의 '궐리' 패방. Ⓒ최종명


취푸의 공자 캐릭터 상품. Ⓒ최종명

취푸의 공자 캐릭터 상품. Ⓒ최종명

공자는 기원전 551년 추읍(陬邑)에서 노나라 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마천이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기록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이견이 있지만, 지금의 취푸(曲阜) 동남쪽 외곽으로 알려져 있다. 노나라 도읍이던 취푸로 간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삼공(三孔)이 있다.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 후손이 살던 저택 공부(孔府), 공동묘지인 공림(孔林)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공자와 더불어, 그 덕분에 살아가는 도시다. 공묘 동쪽 담장에 궐리(闕里) 패방이 있다. 궁궐로 대우하는 셈이다. 공예품 가게가 늘어서 있다. 조각상, 액자, 가방, 부채 등에 공자 캐릭터가 등장한다.

취푸, 공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

취푸 공묘 남문에 '만인궁장'이라고 쓰여 있다. Ⓒ최종명

취푸 공묘 남문에 '만인궁장'이라고 쓰여 있다. Ⓒ최종명

공묘는 베이징의 고궁(故宮), 허베이성 청더의 피서산장(避暑山莊)과 함께 중국 3대 고건축군으로 평가한다. 2007년 처음 찾았을 때 남문 앞에 서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로만 듣던 ‘공자님’ 영혼을 만나러 간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대궐 같은 대문에 적힌 만인궁장(萬仞宮牆)을 보니 호흡도 가빠졌다. ‘논어’에 억장만큼 높은 담장이란 뜻으로 나온다. 공자의 학식이 심오하고 해박하다는 비유다. 그만큼 뜻을 헤아리기 난해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관리이자 서예가인 호찬종의 필체다.

취푸 공묘의 '금성옥진' 패방. Ⓒ최종명

취푸 공묘의 '금성옥진' 패방. Ⓒ최종명

고궁에 비해 5분의 1 크기지만 남북으로 700m, 14만㎡에 이르는 규모다. 공자 사후 이듬해인 기원전 478년 처음 세웠고 역대 왕조가 중건을 거듭했다. 지금 골격은 명나라 시대 형성됐다. 관우처럼 무(武)에서 문(文)의 제왕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금성옥진(金聲玉振) 패방이 보인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공자에 대한 평가다. 제례악은 금종(金鐘)으로 시작해 옥경(玉磬)으로 마무리한다. 도리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집대성했다는 극찬이다. 역시 호찬종의 솜씨다. 함성과 진동으로 표현하니 정말 탁월한 칭찬이 아닐까 싶다.

공자 사당 초입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영성문(欞星門)을 지나니 태화원기(太和元氣) 패방이다. 공자 사상이 우주만물의 근원이자 지고(至高)하고 무상(無上)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산둥 순무를 거친 증선의 필체다.

취푸 공묘의 성시문과 홍도문. Ⓒ최종명

취푸 공묘의 성시문과 홍도문. Ⓒ최종명

문이 계속 나타나고, 문마다 편액이다. 성시문(聖時門)과 홍도문(弘道門)을 지난다. 모두 청나라 옹정제가 고전을 인용해 썼다. ‘맹자’에 따르면 주나라 백성이 되길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백이, 상나라 재상 이윤, 노나라 학자 유하혜를 언급한 후 공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자에 이르러 비로소 시대 추세에 걸맞은 성인이 세상에 나왔다는 성지시자(聖之時者)를 참고했다. ‘논어’에는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다는 인능홍도(人能弘道)와 도가 사람을 넓힐 수 있지 않다는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는 기록이 있다. 황제는 그 뜻도 담았다.

취푸 공묘의 대중문과 동문문. Ⓒ최종명

취푸 공묘의 대중문과 동문문. Ⓒ최종명

대중문(大中門)과 동문문(同文門)을 차례로 지나간다. 청나라 건륭제가 쓴 어필로 모두 ‘중용’이 출처다. 책에 중자천하지정도(中者天下之正道)라는 기록이 있다. 대중이란 공자 사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순리에 맞게 여러 일이 풀린다는 뜻이다. 차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이라고도 했다. 수레바퀴를 하나로, 책의 문자를 하나로, 행동의 윤리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말이다. 서동문은 곧 공자 사상이 학문의 중심이라는 찬양이다.

취푸 공묘 대성문 앞의 향나무. Ⓒ최종명

취푸 공묘 대성문 앞의 향나무. Ⓒ최종명

대성문 앞에 10m 높이의 나무 한 그루가 지붕을 덮을 듯하다.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라 쓴 비석도 함께 있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양광훈이 썼다고 적혀 있다. 선사는 공자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공자가 직접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다.

전설에 따르면 세 그루를 심었는데 모두 고사했다. 1732년 청나라 옹정제 때 갑자기 고목에서 가지가 부활했다고 한다. 한참 서서 바라봐도 믿기 어려운 나무다. 만주족 왕조가 정당성을 얻으려고 한족 백성의 신임을 받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다는 기록이 많다. 유난히 공자와 관련된 명소에 다시 살아난 나무가 많은데 우연보다는 기적에 가깝다.

취푸 공묘 대성문을 들어서는 제공의례 장면. Ⓒ최종명

취푸 공묘 대성문을 들어서는 제공의례 장면. Ⓒ최종명


공묘 대성문과 대성전 사이 행단. Ⓒ최종명

공묘 대성문과 대성전 사이 행단. Ⓒ최종명

갑자기 제례 복장을 입은 행렬이 등장한다. 시간을 잘 맞추면 하루에 한 번 열리는 제공의례(祭孔儀禮) 장면을 볼 수 있다. 북소리에 맞춰 문으로 들어선다. 공자가 제자를 모아놓고 강의를 하던 행단(杏壇)을 통과한다.

도가 사상을 담은 ‘장자’의 어부(漁父) 편에 따르면 공자가 울창한 숲에서 모임을 열었다. 숲의 행단에서 제자는 책을 읽고 공자는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어부의 입을 통했다. 공자가 어진 마음을 지녔는지 모르나 진정한 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비판했다. 1024년 공자의 45대 후손인 공도보가 공묘를 중건할 때 나무를 심고 강단을 세웠다.

공묘 대성전 앞 제공의례. Ⓒ최종명

공묘 대성전 앞 제공의례. Ⓒ최종명


공묘 대성전 앞 제공의례. Ⓒ최종명

공묘 대성전 앞 제공의례. Ⓒ최종명


공묘 대성전 기둥의 이룡희주. Ⓒ최종명

공묘 대성전 기둥의 이룡희주. Ⓒ최종명

대성전 월대에서 제례 행사를 약 30분가량 진행한다. 풍악에 맞춰 무용이 이어지고 절을 하며 제례를 올린다. 비록 약식이지만 공자 신위 앞에서 치러지니 감동이 색다르다.

대성전은 전각의 너비가 45.78m이고 깊이가 24.89m, 높이가 24.8m에 이른다. 구름 속을 날아오르며 구슬을 머금고 있는 용이 기둥마다 줄줄이 하늘을 찌를 기세다.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노자를 만난 소감을 묻자 용과 같다며 유용(猶龍)이라 감탄했다. 덕이 고귀한 사람이란 뜻이다. 새, 물고기, 짐승은 활과 갈고리, 그물로 잡을 수 있는데 노자는 바람과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는 용과 같아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취푸 공묘의 대성전. Ⓒ최종명

취푸 공묘의 대성전. Ⓒ최종명


대성전 안에 높이 3.3m인 조각상이 앉아 있다. 공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이 두 개가 살짝 돌출돼 있다. 브라질 축구 선수 호나우지뉴가 생각난다. 둥글고 큰 눈, 넓은 코도 비슷하다. 붉은 얼굴에 양손을 모아 예를 숭상하는 자세도 단정하다.

건물 양쪽에 72명의 제자와 역대 유학자들 조각상이 즐비하다. 한나라 무제는 유가를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 공자의 부활을 선도했다. 역대 왕조가 공자를 숭상하는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공묘도 황제의 관심에 따라 변모해 왔다. 제례를 올린 후 예의를 표현하기 위해 공자를 예찬한 편액이 수두룩하게 걸렸다. 청나라 강희제가 하사한 만세사표(萬歲師表)는 ‘영원한 스승’에 대한 추앙이다.

만세사표, 공자는 '영원한 스승'

취푸의 공부 대문. Ⓒ최종명

취푸의 공부 대문. Ⓒ최종명

공묘 동쪽에 후손이 살던 저택인 공부가 붙어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시대인 1377년에 처음 건축했고 1503년 홍치제 시대에 지금 골격으로 중건했다. 서예에 뛰어난 명나라 권신 엄고의 친필이 걸린 성부(聖府)가 대문이다. 두 번째 문인 성인지문(聖人之門)은 명나라 대학사 이동양의 친필이다. 명나라 가정제의 친필 은사중광(恩賜重光)이 걸린 중광문이 이어진다. 문을 지나면 양쪽으로 육청(六廳)이 나타난다. 인장, 제례 악보나 황제 하사품, 은자, 공문서와 노비 문서, 악기와 무용 기구를 관리하는 여섯 개의 건물이다.

공부 연성공의 업무 공간인 대당. Ⓒ최종명

공부 연성공의 업무 공간인 대당. Ⓒ최종명

연이어 대당(大堂)이 나타난다. 공부의 주인인 연성공(衍聖公)이 성지를 집행하는 관원을 접견하고 규약에 따른 심판과 훈계를 하는 공간이다. 유학을 중시한 북송의 인종은 1055년에 공자의 장손을 연성공으로 책봉했다. 공자의 46대손 공종원이 제1대 작위를 받았고 이어 세습됐다.

1935년 민국 정부는 77대손 공덕성의 연성공 작위를 취소했다. 대신 제례만 담당하는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에 임명했다. 약 900년 동안 작위를 유지했으나 봉건 왕조가 멸망하자 처지도 변해버렸다. 공덕성은 공자의 혼이 깃든 땅을 버리고 1949년 국민당을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공부 퇴청의 '육대함이' 현판. Ⓒ최종명

공부 퇴청의 '육대함이' 현판. Ⓒ최종명

후청(後廳)은 4품 이상 관리와 회견하는 공간이었다. 연성공에게 준 특권 중 하나인 인재 발탁을 위해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퇴청(退廳)에서는 가족 내 분규를 해소하고 처벌을 내렸다. 육대함이(六代含飴)가 이채롭다. 엿(飴)을 입에 문(含) 상태로 손자를 안고 어르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증손자의 손자인 현손자(玄孫子)의 재롱을 보며 노후를 누리는 집안이란 뜻을 담았다. 무려 육대가 함께 사는 집이었다.

1757년 건륭제가 4번째로 제례에 참석했을 때 마침 손자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71대손 공소환의 고조모인 황씨 부인에게 하사한 편액이다. 고택을 다니면 가끔 육세동당(六世同堂) 현판을 발견한다. 백세 시대라 해도 가능성이 희박한 덕담이다. 자손이 아주 일찍 혼인하고 출산해야만 가능하다. 황씨 부인은 당시 겨우(?) 여든을 넘겼다.

공부 퇴청의 8폭 병풍에 쓴 후적벽부. Ⓒ최종명

공부 퇴청의 8폭 병풍에 쓴 후적벽부. Ⓒ최종명

바로 아래 여덟 폭의 병풍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는 후적벽부(後赤壁賦)다. 북송의 관리이자 시인인 소식이 유배 시절에 쓴 하소연이다. 적벽이 겨울로 접어들고 달밤을 바라보니 쓸쓸했다. 자신의 처지를 노래했다. 67대손 공육은이 쓴 필체다. 황제의 편액을 받은 황씨 부인의 남편이다. 이미 34년 전 작고해 부인과 함께 재롱을 보지는 못했다. 부부의 흔적을 함께 자리매김한 공간이라 그런지 살짝 가슴을 울린다.

공부 내택의 계탐도. Ⓒ최종명

공부 내택의 계탐도. Ⓒ최종명

주거 공간인 내택(內宅)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서면 계탐도(戒貪圖)를 그린 벽이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인 탐을 경계하라는 그림이다. 탐은 모든 보물을 독점하고도 만족하지 못해 하늘의 태양조차 삼키려 했다. 끝도 없는 야심과 채울 수 없는 욕심을 상징한다. 결국 온몸이 불타 바다에 떨어져 비극에 이른다.

‘논어’의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군자유어의(君子喻於義)와 소인유어리(小人喻於利)가 남긴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상인 저택이나 관청에서도 자주 만난다. 공자의 후손이 살던 집안에서 보니 의미가 더욱 강렬하다.

공부 객청의 '홍개자우'(왼쪽)와 '송균영춘' 편액. Ⓒ최종명

공부 객청의 '홍개자우'(왼쪽)와 '송균영춘' 편액. Ⓒ최종명

공부는 모두 463칸에 이르는 저택이다. 많은 방과 누각으로 구성돼 있다. 손님을 맞이하고 가족 잔치나 혼례를 치르는 객청(客廳)이 있다.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자애로운 집이 되라는 홍개자우(宏開慈宇)가 걸렸다. 공씨 문중 사람들이 76대손 공령이의 부인 도씨에게 축수한 선물이다. 서태후의 친필인 수(壽) 자 족자가 있다.

옆방은 부부가 거주하는 전당루(前堂樓)다. 소나무 껍질이 영원히 봄과 같길 기원한다는 송균영춘(松筠永春)이 걸렸다. 공령이가 직접 쓴 글씨로 선비의 품격을 소나무 껍질에 비유한 말이 참신하다. 평온한 삶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는 매년 봄이 와도 공자의 후손은 사라지고 그저 여행객의 감상만이 남았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취푸 공림의 문표. Ⓒ최종명

취푸 공림의 문표. Ⓒ최종명

담장 따라 후문으로 나가면 거리와 연결된다.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공림으로 간다.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한다. 약 200만㎡ 규모에 10만여 개의 무덤이 있다. 입구에서 공자 무덤까지 10여분 걸린다.

길 양쪽으로 문표(文豹)와 녹단(甪端)이 지키고 있다. ‘장자’의 산목(山木) 편에 살찐 여우와 무늬가 아름다운 표범이 산림 깊이 살며 암굴에 숨었으니 고요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영혼이 깃든 장소에 어울리는 지킴이다. 뿔이 하나인 녹단은 하루에 수천 리를 날아다니며 세상의 언어와 소통하는 전지전능한 신화 속 동물이다.

취푸 공림의 옹중과 공급의 묘. Ⓒ최종명

취푸 공림의 옹중과 공급의 묘. Ⓒ최종명


취푸 공림의 공리의 묘 Ⓒ최종명

취푸 공림의 공리의 묘 Ⓒ최종명

기원전부터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우는 석인상을 옹중(翁仲)이라 불렀다. 여의와 칼을 들고 문과 무를 상징하는 옹중이 지키고 있는 공급(孔伋)의 무덤이 나온다. 공자 손자로 자는 자사(子思)이며 ‘중용’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원나라 때 받은 봉호인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비석을 세웠다. 삼세조묘(三世祖墓) 비석도 있다.

공리의 무덤도 있다. 스무 살에 낳은 아들로 자는 백어(伯魚)다. 평생 노모를 공양하며 집을 지키다가 공자보다 4년 먼저 사망했다. 이세조(二世祖) 비석이 있다. 사후 봉해진 작위에 따라 사수후묘(泗水侯墓) 비석이 있다.

취푸 공림의 공자 묘. Ⓒ최종명

취푸 공림의 공자 묘. Ⓒ최종명

공리가 아들 공급을 불러 ‘너는 나만 못하다. 왜냐하면 너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만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공자 묘역을 삼롱(三壠)이라 부른다. 롱은 논두렁이나 이랑이며 분묘라는 뜻도 있다. 공자가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품고 있는 형상을 말한다.

공자 묘는 동서로 30m, 남북으로 28m, 높이가 5m 규모다. 무덤 앞에 비석이 두 개다. 작은 크기의 선성묘(宣聖墓)는 원나라 시대인 1244년에 51대손이자 연성공인 공원조가 세웠다. 앞쪽에 큰 비석의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는 1443년 명나라 정통제 시대 국자감 하급 관리로 훈육 교원 학정(學正)을 역임한 황양정이 썼다.

공묘 숭성사의 두 마리 선학. Ⓒ최종명

공묘 숭성사의 두 마리 선학. Ⓒ최종명

공묘 대성전 옆에 숭성사(崇聖祠)가 있다. 공자의 5세 조상인 목금보를 비롯해 아버지인 숙량흘까지 봉공하는 사당이다. 청나라 옹정제가 작위를 하사했기에 사당을 지을 수 있었다. 선학 한 쌍이 너무 예뻐 일부러 들렀다.

조상의 피를 이은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479년까지 살며 장수했다. 전국을 주유하며 가르치고 또 배웠다. 지금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어깨에 걸치고 노자를 만났다. 스무 살이나 연장자인 석학 노자에 대한 예의였다. 당시는 장수를 기원하는 선물이 산비둘기였다. 그래서 석각에도 새겼다.

취푸에서 판매하는 죽간 형태의 상품인 ‘논어’. Ⓒ최종명

취푸에서 판매하는 죽간 형태의 상품인 ‘논어’. Ⓒ최종명

‘공자님 말씀’을 들으면 예의·효도·충성이나 읊어대는 ‘꼰대’ 느낌이 날지도 모른다. ‘공자 가라사대’를 들으며 자란 세대는 그나마 한자도 읽고 그 뜻에도 조금 익숙하다. 젊은 세대에게 과연 공자가 어떤 이미지로 다가가는지 궁금하다.

취푸에는 ‘논어’를 적은 죽간 상품이 길거리에 널렸다. 첫마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인데, 오늘날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청년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공자는 어떤 인물인지 한걸음 더 들어가려면 취푸로 가라 하고 싶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