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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검사 300명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입력
2021.12.1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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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임관식에서 임명장을 받은 신임 검사들이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5월 3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임관식에서 임명장을 받은 신임 검사들이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검찰청 출입기자 시절 차장검사와 부장검사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기자들이 사실상 공보관만 접촉할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장검사 이상 검찰 간부들을 사무실에서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기자는 취재 목적으로 접근하지만, 검사들은 기자들 유도신문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TV 뉴스를 보면서 정치권 얘기만 하다가 헤어지곤 했다.

검찰 간부들이 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냉소적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검사들은 국회를 한심한 사람들만 모인 집합소로 간주했다. 싸우고 욕하고 천박하고 무식하고 웃긴다고 했다. 정치인 비리 수사를 해본 검사들은 불신 DNA가 더욱 깊게 각인됐다. 정치인들 수준이 높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검사들은 국회의원에 대해 소시민들이 품고 있는 최소한의 존경심도 없었다.

검사들은 정치 뉴스를 자주 시청했다. 그러면서 ‘정당에서 상대방 고소ㆍ고발을 그만해야 한다’ ‘검찰청 항의 방문하는 정치 쇼는 왜 하는 것이냐’며 일리 있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발언 수위가 높아지면 ‘법이나 제대로 만들었으면’ ‘정치인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 ‘국회를 확 갈아엎어야’ 등 거친 말들을 내뱉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검찰 간부는 ‘국회의원 300명을 현직 부장검사들로 모두 교체해도 지금보다는 낫겠다’며, 정치권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는 매우 자신만만했고 정치적 야망이 있어 보였는데, 실제로 총선에 출마했다. 현재 전국 검찰청의 부장검사 이상 간부는 400명이 넘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라면 부장검사들은 모두 잠재적인 국회의원 후보들이다.

허풍 같지만 아닐 수도 있다. 선거철만 되면 서울대 법대 나온 엘리트 검사들은 수도권 지역구 후보로 거론되고, 상경(上京)한 검사들도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지역의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는 게 현실이다. ‘부장님 같은 분이 정치를 해야 나라가 확 바뀐다’는 말을 덕담처럼 건네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금과옥조 같았던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최근엔 순진한 검사들만 사용하는 말이 돼버렸다. 심판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직접 선수로 뛰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시선도 이제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사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검사 출신 법조인 17명이 국회에 입성했고, 지난해 치러진 21대 총선에서도 15명이 배지를 달았다. 낙선했거나 예비 경선에 뛰어들었던 인사들, 그리고 주변에서 고문 역할을 했던 이들까지 포함하면 여의도 생활을 꿈꿨던 검사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 검찰청이 어느새 정치인 양성소로 변해 버린 것이다.

급기야 검찰총장 출신인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는 여의도를 건너뛰고 곧바로 청와대 입성을 노리고 있다. 윤 후보 주변에는 현재 검사 출신들이 포진해 그를 보좌하고 있다. 정치권에 작은 검찰청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검사들이 나라를 접수하면 세상이 달라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거다. 다만 앞으로 검사가 되려는 사람은 선배들이 남겨 놓은 행적 탓에 이런 비아냥은 들어야 할 것 같다. “당신 정치하고 싶어서 검사 되고 싶은 거지?”


강철원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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