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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능선 낡은 비석에서 글자를 찾아낸 순간, 추사는 얼마나 흥분했을까

입력
2021.12.18 12:00
수정
2021.12.18 14:48
14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3> 한국 고고학의 원조 추사 김정희의 자취

조선 문인화가 허유가 그린 추사 김정희 반신상(왼쪽)과 추사 대표작 중 하나인 족자 대련. 국립중앙박물관·리움 소장

조선 문인화가 허유가 그린 추사 김정희 반신상(왼쪽)과 추사 대표작 중 하나인 족자 대련. 국립중앙박물관·리움 소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로서 조선시대 문화예술과 학문의 최고의 아이콘이다. 또한 학문의 새로운 경지를 만든 현대적 의미의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호암미술관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호고유시(好古有時: 어릴 적부터 옛것이 좋아서)…’로 시작하는 족자 대련(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대구)의 글씨를 처음 대했을 때, 나는 그가 그저 옛 글씨를 좋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어느 저명 문사의 글을 자랑 삼아 쓴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사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진정한 현대 고고학자였다. 그리스 신화를 암송하고 그 유적들을 찾아다녔던 서양 고고학의 원조 슐리만(1822~1890)처럼 추사도 우리 고대 유물인 비석과 유적을 찾아 역사를 복원하였던 것이다.

특히 절친이던 청나라 금석학자 옹수곤(翁樹崑)이 사망한 이후 추사는 북한산의 비봉, 감포 앞바다의 문무왕릉, 경주의 사천왕사지와 경주 동쪽의 무장사지 등을 찾아 금석학의 새로운 경지를 구축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곳들은 모두 삼국통일과 관련된 신라사의 유적이다. 오랫동안 머리 속에서만 머물던 200년 전 '추사 고고학'의 길을 따라서 나섰다.

금석학자 김정희, 고고학자 김정희

우리나라에서 일제강점기 때의 식민지 고고학 이전에는 고고학이 없었을까? 고려시대의 문집에도 고인돌이 등장하고 조선시대 기록에도 돌도끼가 발견됐다는 내용이 보인다. 하지만 비석돌, 즉 유물을 가지고 역사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은 추사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금석문(돌, 쇠 등에 새겨진 글과 문자)을 통한 역사 고증이 나타났는데, 추사에게 크게 영향을 준 유득공은 청나라에도 잘 알려진 금석학자였다.

그러나 추사의 고고학적인 생각은 금석문을 해독하고 역사를 복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문무왕비를 찾기 위해 경주 낭산 부근의 땅을 파서 확인하고 경주 일대 작은 산들이 신라왕들의 무덤이라는 점을 논하고 진흥왕의 무덤을 추정한 것은 오늘날의 고고학과 다를 바가 없다. 샹폴리옹이 로제타돌의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중국 동조빈(董作賓)이 갑골문을 해독했듯 문자해독이 현대고고학의 원조로 여겨지는데, 추사는 한걸음 더 발전한 고고학을 한 것이다.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를 찾다

오늘날 서울이 깔고 앉아 있는 큰 돌덩어리는 선캠브리아기(약 5억9,000만 년 이전 시기)에 생성된 화강편마암이다. 그 기나긴 세월과 풍상을 견디고 견뎌서 북한산과 관악산의 신선 같은 봉우리를 만들었다. 북한산의 비봉 역시 그런 허연 살이 보이는 봉우리의 하나이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서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위)와 20세기 전반의 일대 전경(아래)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서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위)와 20세기 전반의 일대 전경(아래)

만만치 않은 등반이다. 비봉의 꼭대기에 서 있던 비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엄격한 고증을 거쳐 경주의 돌로 제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 시대에는 얼마나 가지고 오르기 힘들었을까? 그 열정이 삼국을 통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 비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을 정하기 위해 이곳에 올 것'이라는 예언을 적은 비로 알려져 왔다. 비문을 읽을 수 없어 '몰자비'(沒字碑: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로 생각하고 내력을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인 것이다. 그러던 비가 추사의 시선을 끌었고 1816년 추사가 처음으로 비봉에 올라 탁본을 하고 글자를 읽어냄으로써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사의 해독으로 비의 내용과 건립연대를 알 수 있게 됐다.

진흥왕 순수비(왼쪽)와 탁본들. 맨 오른쪽 탁본은 비의 두 개 면의 탁본을 합쳐 표구한 것인데 작은 것은 추사가 이 비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비의 측면에 새긴 것으로 '정희(正喜)'라는 글자가 포함돼 있다.

진흥왕 순수비(왼쪽)와 탁본들. 맨 오른쪽 탁본은 비의 두 개 면의 탁본을 합쳐 표구한 것인데 작은 것은 추사가 이 비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비의 측면에 새긴 것으로 '정희(正喜)'라는 글자가 포함돼 있다.

비봉에 이 비를 세운 것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의 한강 유역에 대한 확고한 집념을 보여준다. 북에서 임진강을 건너면 마주하는 고갯마루에 칠중성이 있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감악산에 신라비, 그리고 북한산 비봉에도 비가 있는데, 한강을 지키기 위한 신라의 핵심 전략으로 보인다. 한강을 지켜야 당과 안전하게 통교할 수 있으니 이 북한산비야말로 대국민 전략 선언이었던 셈이다.

몰자비에서 글자를 발견한 추사는 얼마나 흥분하였을까? 세기의 발견을 하였으니 그 꼭대기 바람 부는 곳에서도 펄쩍펄쩍 뛰지 않았을까? 탁본하는 과정에서 희미하게 백지에 떠오르는 글자 모양을 보면서 추사의 눈이 커지고 가슴이 쿵쾅대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도 '추사 고고학'을 따라가는 여행의 묘미이다.

무장사를 오르며 느끼는 추사의 숨소리

경주 통일신라 사찰인 무장사 절터.

경주 통일신라 사찰인 무장사 절터.

경주 통일신라 사찰인 무장사(鍪藏寺). 보문지구에서 산을 넘은 뒤 덕동호수 끝자락에 있는 동리에서 다시 산을 오르는 추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좁고 험한 골짜기 계곡을 올랐을 것이다. 절벽 높은 곳에 있어 소나무 숲 속 어른거리는 탑이 아니었으면 절터를 그냥 지나칠 뻔했다.

전설에 따르면 '무장'이라는 이름은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의 투구를 묻은 곳인데, 이는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절터는 왜구가 동해에서 침투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하니, 이곳을 잘 지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왼쪽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탁본의 일부. 오른쪽은 추사가 무장사에 방문해 이 비를 찾은 뒤 이 사실을 비에 새긴 것을 탁본한 것. 예서에 가까운 초기 추사체 글씨다.

왼쪽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탁본의 일부. 오른쪽은 추사가 무장사에 방문해 이 비를 찾은 뒤 이 사실을 비에 새긴 것을 탁본한 것. 예서에 가까운 초기 추사체 글씨다.

전해진 탁본을 보고서 분명 다른 비편이 있을 것이라는, 청나라 금석학자 옹수곤의 견해를 따라 확인차 이 절터를 찾았던 추사는 탁본된 비편에 맞아떨어지는 다른 새로운 비편을 실제로 찾아내고선 좋아서 펄쩍 뛰었다고 적었다. 옹방강(옹수곤의 아버지)은 이곳 비의 글씨를 왕희지 글씨의 유입 경로를 파악할 증거로 보았는데, 필법 연구의 대가이기도 한 추사는 이 의견을 듣고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탁본으로 전해오는 유적을 탐사하여 새로운 유물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비가 '이 절에 아미타불을 모셨다'는 내용을 담은 김육진의 글을 왕희지 글씨로 집자(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다만 최근에는 글씨의 날카롭고 활달한 모습이 기계적으로 집자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무장사 아미타불조성사적비(복제비신)와 세부. 쌍거북과 12지가 장식된 귀부의 조각이 아름답다. 오른쪽은 삼층석탑.

무장사 아미타불조성사적비(복제비신)와 세부. 쌍거북과 12지가 장식된 귀부의 조각이 아름답다. 오른쪽은 삼층석탑.

깨어진 비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지만 현장에는 비신(비석의 몸체)이 깨끗하게 복원돼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장식 조각이 심상치 않다. 비좌 주변으로 12지가 조각되었고 땅을 짚고 있는 거북이 두 마리가 있다. 당시 왕비가 죽은 왕을 위해 세운 것이어서 최고의 비 조각품이다. 200여 년 전 추사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절이 서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날 석탑과 비만 남은 텅 빈 절터를 보니 천수백 년의 풍상이 느껴진다.

경주 사천왕사 부근에서 발굴한 문무왕비

맑은 날, 푸른 하늘 아래 감포 앞바다는 동해의 다른 바닷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언제나 파도가 부딪혀 하얀 거품이 일고 있는 대왕암 때문일 것이다. 바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재위 661~681)의 유언대로 유골을 뿌린 곳이다.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것을 막으려 이곳에 묻힌 것이다. 감은사는 대왕암을 내려다보는 산기슭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감은사를 지을 때 절의 하부에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었다.

경주 감은사지에서 내려다보는 감포(위). 문무왕이 통일을 염원하여 세운 절인 사천왕사지(아래).

경주 감은사지에서 내려다보는 감포(위). 문무왕이 통일을 염원하여 세운 절인 사천왕사지(아래).

문무왕비는 경주 부윤이었던 홍양호(洪良浩)에 의해 처음 발견돼 탁본이 이뤄졌지만, 정작 비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1817년 경주를 방문한 추사는 낭산 아래 신문왕릉 앞에서 땅을 파, 결국 비의 상하단 두 조각을 발굴했다. 그 빗돌은 사천왕사의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의 구멍에 정확하게 맞았다고 한다. 추사는 이 비를 실측하고 글자 배치 구조를 도면화한 뒤 해독했고, 설치 연대가 신문왕 7년(687년)이며 비에 등장하는 성한(星漢)왕은 김알지의 아들이라고 보았다. 이 비에 새겨진 ‘투후(秺侯)’라는 명칭의 직위는 중국 한무제가 봉한 흉노의 김일제(金日磾)밖에 없기 때문에 신라의 지배세력이 흉노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바로 경주 김씨의 조상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사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비의 내용이다.

이 두 조각은 추사 발굴 이후 사라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1961년과 2009년에 하단편과 상단편이 다시 나타나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추사만큼 고대의 유물을 귀하게 여기고 보관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추사가 발굴한 문무왕비 두 편(왼쪽)과 문무왕비가 서 있었을 것으로 보았던 사천왕사지에 있는 귀부.

추사가 발굴한 문무왕비 두 편(왼쪽)과 문무왕비가 서 있었을 것으로 보았던 사천왕사지에 있는 귀부.


'어릴 적부터 옛것이 좋아서(好古有時)...'

어릴 때 꿈을 좇아서 평생 그 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행복이다. 늦가을 서릿발 같은 그의 학문 이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추사 고고학의 현장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왜, 더 일찍 이 길을 걷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다.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고대에 대한 추사의 열정을 배울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추사는 비석의 글과 글씨를 중심으로 하는 청대의 고증학을 훨씬 뛰어넘어서 유물과 유적 현장을 답사하여 역사적 사실을 복원한, 현대적 의미의 고고학 경지를 보여줬다. 200년 전에 이루었던, 요즘 유행하는 말로 K학문인 셈이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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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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