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다양성'의 두 얼굴… '번지 점프를 하다' 리메이크는 왜 무산됐나

입력
2021.12.13 15:20
수정
2021.12.13 16:4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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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아이돌 스타 캐스팅하고 돌연 제작 중단
영화 원작 작가 "종교적 신념" 리메이크 반대
동성애 등 문화 다양성 두고 이견
카카오엔터 "원작 작가 신념 존중"
"1년 쓴 작품은 휴지 조각" 드라마 작가 호소
우리 사회 빈약한 문화 다양성 현실 지적도

2001년 개봉한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연인인 태희(고 이은주)와 인우(이병헌)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장면. 다양성 영화인 이 작품은 당시 100만 관객을 불러들이며 이례적 흥행을 기록했다. 초이스컷픽쳐스 제공

2001년 개봉한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연인인 태희(고 이은주)와 인우(이병헌)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장면. 다양성 영화인 이 작품은 당시 100만 관객을 불러들이며 이례적 흥행을 기록했다. 초이스컷픽쳐스 제공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앞세워 한국 드라마가 소재와 장르의 다양성으로 해외에서 연일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정작 국내 방송가에선 이 다양성을 둘러싼 이견으로 마지막회 대본까지 나온 드라마 제작이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 한류 아이돌 스타 캐스팅을 발표했던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2001) 드라마 리메이크 작업이 최근 돌연 전면 백지화됐다. 13일 여러 방송가 관계자에 따르면원작 시나리오 작가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해 드라마 제작이 무산됐다. '번지~'의 리메이크 등 2차 저작물에 대한 권한은 원작 영화 제작사이자 이 드라마 리메이크를 기획한 초이스컷픽쳐스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제작사가 원작 작가의 반대로 곧 촬영을 앞둔 작품 제작을 철회하기는 이례적이다. '번지~' 드라마는 내년 1월 촬영에 들어가 같은 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인 카카오TV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었다.

'번지 점프를 하다' 드라마 1회 대본 표지. 작가 이차연씨 제공

'번지 점프를 하다' 드라마 1회 대본 표지. 작가 이차연씨 제공

본보 취재 결과, 대중문화 산업의 큰손인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영화 '역린' 등을 제작해 충무로에서 입지를 다진 제작사가 함께 드라마 제작을 추진하다 백기를 든 과정은 이랬다.

원작 작가는 9월 '번지~' 드라마 연출을 맡은 김종혁 PD와 제작사인 초이스컷픽쳐스 최낙권 대표에게 '드라마 리메이크를 하지 말아 달라'는 연락을 했고, 결국 최 대표가 몇 차례에 걸쳐 작가를 접촉했다. '번지~' 드라마 관계자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원작 작가가 '환생, 자살, 동성애 관련 스토리를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교사 서인우(이병헌)가 그의 죽은 연인인 인태희(고 이은주)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남학생을 만나면서 묘한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그린다. 개봉 당시, 다양성 영화로 큰 반향을 낳았던 이 작품을 쓴 원작 작가는 '번지~'를 쓴 뒤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자신이 쓴 옛 작품의 리메이크를 반대한 배경이다.

카카오엔터 관계자는 "리메이크 등 2차 저작물에 대한 권한은 모두 제작사가 보유해 드라마 제작을 진행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하지만, 논의 끝에 신념에 따른 작가의 의견을 존중해 제작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들은 '번지~' 드라마 제작 강행으로 K작가가 법적 분쟁을 벌이고, 이후 종교적 논란으로 불똥이 커지면 구설에 오를 것을 우려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이 제작에서 결국 손을 뗀 것으로 보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제작사는 '번지~' 드라마 대본을 쓴 작가 등에 대한 피해 보상 문제를 논의 중이다. 2차 저작물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는 제작사가 만약을 대비해 원작 작가에 먼저 확인을 하고 리메이크를 추진했다면, 드라마 대본을 쓴 작가 등이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번지~' 드라마 리메이크 무산을 바라보는 국내 대중문화 관계자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원작자의 뜻을 존중해 준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반대로 창작의 다양성을 옥죄는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누구나 생각이 바뀌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때가 올 수 있고, 손익보다 이 지점을 고려해 원작 작가의 뜻을 존중해 준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로 인해 드라마 제작을 준비하던 창작 인력에 피해가 갔을 테고 그 보상도 중요한 문제인 만큼, 이번 드라마까지는 제작하고 추후엔 원작자의 신념을 고려해 리메이크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는 게 합리적 대안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드라마 리메이크 작업은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됐고, 대본은 이미 16부가 모두 완성됐다. 내년 1월 본격적인 촬영을 앞두고 진행된 사전 제작 과정엔 10여 명의 스태프가 투입됐다. '번지~' 드라마 대본을 쓴 작가 이차연씨는 "원작 작가의 신념은 존중해 주면서 1년여 동안 대본 집필을 맡은 작가의 작품은 휴지 조각을 만들어도 되는 건지 꼭 묻고 싶다"고 말했다.

'번지~' 드라마 제작 무산은 한국 사회의 빈약한 문화 다양성의 토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라는 목소리도 있다.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차장은 "이 갈등은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차별금지법 도입 등 사회 전반이 바뀌어야 해결이 날 수 있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세상에서 '번지~'를 주목하게 만든 것은 관객들"이라며 "예술 발전을 위해 당장 제작을 중단하기보단 더 고민을 해야 하지 않나란 생각"이라고 의견을 냈다.

'번지~'는 앞서 뮤지컬로 리메이크됐다. 최측근에 원작 작가의 입장을 듣기 위해 10일부터 연락을 취했고, 이날 오전까지 기다렸으나 "연락 드리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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