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예술가들의 신경전...학교 놓고 벌인 샤갈과 말레비치의 다툼

입력
2021.12.14 04:30
22면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展’ 특집 <9>

1921년 9월에 촬영된 작업 중인 우노비스 회원들과 말레비치. evitebsk.com 제공

1921년 9월에 촬영된 작업 중인 우노비스 회원들과 말레비치. evitebsk.com 제공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 이는 비단 국제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마도 필요 이상의 경쟁 심리와 자기 보호 본능을 가장한 이기주의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이러한 갈등은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흔히 관찰되며 이는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소개할 갈등의 당사자는 마르크 샤갈과 카지미르 말레비치이며 두 사람이 벌이는 신경전의 무대는 벨라루스의 작은 도시 비쳅스크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거점 중 하나로 잘 알려진 비쳅스크는 샤갈의 고향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특히 강했던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 비쳅스크현(縣) 인민계몽위원회 미술분과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19년 1월 비쳅스크에 미술 전문학교를 설립한다. 여러 행정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는 학생들에게는 물론 좋은 일이었으나 운영을 담당하는 이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초대 교장으로 샤갈이 추대한 므스티슬라프 도부진스키는 한 달 만에 도망치듯 사임하였고 결국 샤갈이 학교의 교장직을 직접 도맡아야만 했다. 내전 시기의 열악한 환경과 학교 행정의 어려움이 맞물려 샤갈은 아예 학교 내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다시피 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해 5월 샤갈은 자신과 같은 유대인이자 미술학교 동문인 라자르 리시츠키를 교수로 초청하였다. 후에 엘 리시츠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그는 같은 해 10월 다녀온 모스크바 출장에서 절대주의의 창시자 말레비치를 교수로 섭외하였다. 당시 실업 상태였던 말레비치로서는 어디든 자신을 불러준다면 감지덕지한 상황이었고 샤갈로서는 수도에서 활동하던 유명 미술가가 교수로 온다면 학교의 홍보와 운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는 샤갈에게는 결과적으로 호랑이 새끼를 집 안에 들인 꼴이 되었다.

말레비치는 비쳅스크에 도착하자마자 타고난 입담과 카리스마로 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일거에 휘어잡았다. 샤갈은 말레비치가 강의하는 절대주의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여러 과목 중 하나 정도로 여겼지만 말레비치와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절대주의를 말 그대로 새 시대의 미술이 나아가야 할 절대적인 지향점으로 삼았으며 그 외의 다른 양식의 미술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하여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샤갈의 작품 또한 그들의 날 선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말레비치와 그 추종자들은 비쳅스크를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변모시킬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말레비치가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비쳅스크 시내 곳곳이 절대주의 도형들로 장식되기 시작할 정도로 그들의 활동력과 영향력은 강력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레비치는 리시츠키와 니콜라이 수에틴 등 자신을 따르는 학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의 확립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우노비스(UNOVIS)를 설립하였다. "구세계의 타도가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있기를." 그것이 우노비스의 구호였다.

니콜라이 수에틴의 절대주의 도자 세트(1923년 작). 예르미타시 박물관 제공

니콜라이 수에틴의 절대주의 도자 세트(1923년 작). 예르미타시 박물관 제공

샤갈은 형식상으로는 학교 내에서 말레비치보다 상급자였으나 이미 그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샤갈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이후 기록된 그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 관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으며 샤갈이 말레비치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1920년 5월 절정에 이른다. 모스크바 출장을 다녀온 샤갈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학교 정문에 '절대주의 아카데미'라고 내걸린 현수막을 보았고 이에 그간 쌓여온 그의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그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샤갈은 사랑해 마지않던 고향 비쳅스크를 영영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버린다.

마르크 샤갈의 '녹색 바이올리니스트(1923~24년 작)'.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제공

마르크 샤갈의 '녹색 바이올리니스트(1923~24년 작)'.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제공


마르크 샤갈의 '떠돌이 유대인(1923~25년 작)'. 제네바 현대미술관 제공

마르크 샤갈의 '떠돌이 유대인(1923~25년 작)'. 제네바 현대미술관 제공

아이러니하게도 두 거장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20세기 미술을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비쳅스크 미술학교를 기반으로 성장한 우노비스는 절대주의를 응용한 실용품 디자인을 통해 구축주의(구성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저변을 마련하였고, 샤갈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환을 원동력 삼아 '녹색 바이올리니스트' '떠돌이 유대인' 등 환상적이고도 서정적인 여러 명작을 남겼다.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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