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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유효한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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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와 뉴멕시코 산타페 두 곳에 캠퍼스를 갖고 있는 세인트존스 칼리지는 교실에서 강의를 하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은 그리스 철학, 중세 문학, 과학, 음악과 예술, 현대 정치와 경제 분야 고전 100권을 읽고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다. 캠퍼스 곳곳에서 책을 끼고 다니며 읽고, 세미나실에서는 치열하게 토의한다. 소그룹 세미나에서 학생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 바로 교수의 지적을 받고,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해도 경고를 받는다. 서로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경청하며 배워 가는 열린 토의가 이 대학 특유의 공부 방식이다.
학생들이 읽는 책의 리스트는 세인트존스가 문을 연 1784년 이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1학년은 라틴 고전으로 시작하고, 2학년 때는 중세 문헌을 읽는다. 3학년은 르네상스 이후, 4학년은 19세기 이후 인류의 지식 전통을 직접 읽는다. 유클리드의 '기하학'(1학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2학년),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3학년), 다윈의 '종의 기원'(4학년) 등 현대 수학과 과학에 큰 영향을 끼친 고전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세인트존스가 교양 교육을 중시하는 미국 리버럴아츠 칼리지 중에도 상당히 극단적인 경우인 것은 맞지만, 미국 대부분 대학의 학부 과정은 특정 전공 지식의 전달보다 폭넓고 탄탄한 읽기와 생각하기 연습을 중시한다. 대형 명문 사립대학과 주립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주 대입 수능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성적표와 배치표를 오가는 수험생과 학부모의 눈이 바빠지는 시즌이 또 다가왔다. 최근 영국 BBC는 우리 수능이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시험이지만 시대적 효용성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논평했다. 1994년 최초의 수능 설계책임자 중 한 명은 수능시험의 당초 목적이 수험생들을 촘촘히 줄 세우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그럼에도 수능은 가장 공정한 줄 세우기 방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합격자를 가려내는 절대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 대학생들이 엄청난 양의 책을 깊이 읽고 열린 토의를 연습한 미국 엘리트들과 과연 제대로 경쟁할 수 있을까.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학생들은 데이터 과학을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데이터 과학 지식을 과연 어디에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고난도 AI 모델 설계를 위해 필요한 창의적 사고의 경험과 체화다. 이 대목에서 우리 대학생들이 고전 읽기를 통해 인간 탐구와 수학적 논리의 근원을 깊이 성찰한 경쟁국 대학생들과 과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우리 대학생들을 너무 조급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수능 고득점 전략과 협소한 전공의 작은 렌즈만으로는 큰 세상을 볼 수 없다. 다음 세대에게 허리를 쭉 펴고 먼 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정진하는 여유,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그려갈 충분한 여백을 제공해야 한다. 미국 리버럴아츠 칼리지의 존재 목적은 단순히 보편적인 교양인을 키우는 데에 있지 않다. 이들 대학은 넓은 안목과 튼튼한 생각 근육을 갖춘 각 분야 전문 리더를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인터넷 강의와 유튜브 정보가 대세인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 속에서 실용성을 중시해 온 미국 대학들이 인류가 대변혁을 겪고 있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는 공부 방식을 적극 권장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세계는 넓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나아갈 글로벌 아레나에는 강자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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