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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의 새로운 판단 기준 감수성

입력
2021.12.10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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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꽤 지적인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단 소리를 곧잘 들었다. 학생 때는 잠시 운동권에 몸을 담았을 수도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후배들에게 가르쳤을 수도 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당신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보거나, '어쩌다 어른' 같은 교양 강연 프로그램을 보는 걸 즐겼을 것이다. 가끔은 지식인이라거나 강남 좌파라는 별명이 따라붙었을 수 있다. 그러니 당신이 어떻게 억울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자녀가, 부서에 막 들어온 신입이, 당신을 '계몽된'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 말이다. 어제만 해도 당신은 딸의 친구에게 날씬해졌다는 칭찬을 했다가 딸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반가워서 그랬지."
"반가우면 반갑다고 해. 외모 칭찬하지 말고."

이 에피소드에 공감이 가는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너무 많아진 것 같은가? 살 빠졌다고 칭찬도 못 하고, 결혼은 했냐고 물어보지도 못하는 세상이 너무 각박한 것 같은가? 대선 후보도 유세에서 '장애인도 정상인처럼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다가 비장애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한 소리 듣는 걸 보니, 당신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시대 계몽의 기준이 변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근대 이후 계몽된 인간이란 이성과 지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아는 것이 그 시대의 지성이었다. 계몽(啓蒙)은 Enlightenment를 번역한 한자어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성을 가지지 못함이 이전 시대의 어리석음이었다면, 다가오는 시대의 어리석음은 감수성을 가지지 못함이다.

페미니즘 감수성, 인권 감수성, 노동 감수성, 젠더 감수성, 다문화 감수성, 성인지 감수성. 감수성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와 관련될 때가 많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분위기를 싸하게 할 때가 많고, 마땅히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서 배우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감수성을 익히는 일은 섬세하고 복잡한 데 반해, PC함을 욕하는 일은 단순하고 편하다. 씹선비, PC충, 예민충. 감수성은 인간과 외적으로 가장 멀어 보이는 곤충의 이름과 붙어, 감수성을 강조하는 자들을 되레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치부한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나서 'PC에 대한 강박이 지나치다'라고 말하면, 당신도 그 편을 들고 싶어질 수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우유는 여성을 젖소에 비유하는 광고를 찍어 비판을 받았다. 결국 9일, 서울우유는 공식적인 사과문을 올렸다. 영상 제작에 참여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영상이 논란이 될 걸 알지 못했을까? 아마 주요 결정권자들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우유는 당장 불매 운동의 위기에 처했다. 감수성을 무시하는 당신에게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갑이 열리고 닫힘이 달렸으므로, 감수성을 배우자고 말하고 싶진 않다. 메타버스나 대체 불가능 토큰(NFT)의 세계에서 소외되는 것만큼, 감수성의 세계에서 소외되는 것도 당신에게 치명적이라고 협박하고 싶지도 않다. 감수성을 가진다는 건 우리가 보다 인간적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존엄만큼, 상대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존엄의 자리에 돈주머니나 협박은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은, PC한 사람인가?


박초롱 딴짓 출판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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