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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고한 옥살이의 보상을 거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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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3명을 살해했다는 누명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만 19세 흑인 청년이 수감 중 난치병에 걸려 손-발가락 7개를 잃고 15년 만에 가석방됐지만, 통증을 견디려고 코카인에 의지했다가 다시 체포돼 6년형의 가중 처벌을 받았다. 끈질긴 항소와 거듭된 재심 끝에 88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살인 누명을 벗은 만 44세의 그는 "어떤 이유로든 법정엔 다시 서기 싫다"며 주 정부와 검찰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 소송마저 포기했다. 아니 거부했다.
"그들(정부)은 내 삶을 보상할 수 없다. 200만 달러면 될까? 아니면 300만 달러? 나는 수감 기간 1년당 2억 달러를 원한다. 아니 하루당 2억 달러를 원한다. (...) 나는 그들에게 내 삶의 값어치를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얼마나 헐한 존재로 생각하는지 이미 지겹게 봐왔기 때문이다."
국가배상(형사보상) 소송 거부로 정부의 배상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타락한 법적 정의와 삶의 존엄을 일깨우고, 남은 생을 형사-사법 정의와 흑인 청소년 계도에 바친, '루빈 카터의 친구' 존 아놀드 아티스(John Arnold Artis)가 11월 7일 복부대동맥류(abdominal aneurysm)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나는 그들에게 내 삶의 값어치를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John Artis, 2000년 1월 W.P 인터뷰
2014년 5월 '가만한 당신'의 주인공이 루빈 "허리케인" 카터(Rubin "Hurricane" Carter)였다. 프로복싱 미들급 복서 '허리케인(애칭)' 카터가 1966년 백인 3명을 권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백인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가 만 19년 만인 85년 연방지방법원 재심 판결로 무죄로 풀려난 사연. 그를 기소한 당시 검찰은 '그는 범인이 아니'라던 피해자의 숨지기 직전 증언도, 범행 시점 그가 다른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는 알리바이 증언도, 그가 소지한 권총 실탄이 범행에 사용된 것과 다른 사실도 묵살했다. 대신 범행 현장에서 다른 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된 두 백인 범죄자의 증언, 즉 도주한 두 흑인 범인 중 한 명이 카터와 닮았다는 진술과 도주 차량이 카터의 차와 유사한 흰색 크라이슬러 다지(Dodge)였다는 말에 주목했다. 사건 당일 새벽 경찰 검문을 당했던 카터는 약 넉 달 뒤, 차를 운전했던 '친구'와 함께 기소됐다. 그 친구가 아티스였고, 저 모든 일이 일어난 곳이 짐 자무시 감독의 2016년 영화 '패터슨'의 배경이던 뉴저지주의 작은 도시 패터슨(Paterson)이었다.
사실 당시의 아티스와 카터는 친구라 하기도 애매한 사이였다. 월드 챔프를 노리던 루빈 카터는, 인구 14만 명의 소도시 패터슨에서 모르는 이가 없던 스타 복서였고, 특히 흑인들의 영웅이었다. 군입대를 앞두고 트럭 기사로 일하던 만 18세 청년 아티스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아티스는 그날 클럽에서 카터를 만나 인사를 나눴고, 귀가하려던 그의 차를 대신 운전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했고, 생일 하루 전날 그의 영웅과 함께 난데없이 살인 혐의로 체포-기소됐다.
아티스가 태어난 곳은 인종 차별과 주거 분리가 엄격하던 버지니아 주 포츠머스(Portsmouth)였다. 그가 살던 에핑엄 스트리트(Effingham Street)는 흑인-백인 동네를 나누는 경계였지만, 어린 아티스가 알고 지낸 또래 백인은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던 집 주인 아들이 유일했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어머니는 외동아들을 덜 차별 받는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8세 된 아티스를 데리고 패터슨으로 이사했다. 아티스는 조숙하고 영특했다. 교회 성가대원으로, 보이스카웃 대원으로 활동하며 공부도 곧잘 했고, 특히 언어능력이 발군이어서 단어 맞히기 시합에선 져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고교시절 그의 재능은 트랙(허들)과 풋볼 농구 등 스포츠에서도 도드라졌다. 올림픽 출전 경력이 있던 학교 트랙 코치는 그를 수시로 집에 초대해 고기 파티를 열어주며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키워주곤 했다. 아티스는 65년 콜로라도 애덤스 주립대 4년 학비 전액 면제 체육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는 하지만 중병을 앓던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입학을 연기했고, 얼마 뒤 어머니는 만 44세로 숨졌다. 대학 진학을 연기한 아티스에겐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미국 징병제는 1973년 폐지됐다.) 입대 전까지 그는 트럭 기사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그는 군 복무 후 대학에 진학해 카터처럼 프로 스포츠 선수가 되길 원했고, 안 되더라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경찰·검찰 조사와 재판- 판결 이후에도 한결같이 결백을 주장하던 카터와 아티스는 뉴저지주립교도소(State Prison Trenton)에 함께 수감됐다. 하지만 둘의 수형 태도와 각오는 판이했다. 만 30세의 카터는 감옥 노역과 운동마저 거부하며 농성하듯 감방에 칩거했다. 그는 교도소가 제공하는 음식조차 '유죄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며 손도 대지 않았고, 지인들이 넣어준 사식으로 만 19년을 버텼다. 반면 아티스는 간수들의 지시사항을 철저히 준수하며 극히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했다. 동료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육상팀을 꾸려 옥사 대항 담배 내기 시합을 벌였고, 중급 교도소인 로웨이(Rahway)주립교도소로 이감된 뒤에는 '이글스'라는 수형자 풋볼팀을 꾸려 선수 겸 코치 겸 단장으로서 지역 경기 3년 무패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는 동료 수형자의 존경을 받았고, 간수들도 그를 존중했다. 71년 트렌턴 교도소 죄수 폭동 때는 인질로 잡힌 간수 4명의 탈출을 돕고도 수형자들의 보복 린치는 물론 위협조차 받지 않았다. 2014년 인터뷰에서 그는 "감옥이 나를 나답지 않은 존재로 변질시키는 걸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정말 위험한 이들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맞거나 강간 당하거나 칼에 찔린 적도, 위협당한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카터가 보이지 않는 철조망으로 감옥을 격리시킴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지켰다면, 아티스는 감옥의 불리를 최대한 무시함으로써 영혼을 지켰다.
74년 카터가, 옥사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아티스와 서로 고함쳐 가며 의견을 나눠 썼다는 옥중 수기 '제16라운드'를 출간한 것도, 결백을 호소하기 위한 고집의 결실이었다. 그 책을 읽고 카터를 면회한 가수 밥 딜런이 이듬해 '허리케인'이란 노래를 지어 공연하며 그의 결백과 재심 소송 모금 운동을 펼쳤고, 수많은 공익 인권단체와 유명인사들이 그 대열에 가세했다.
둘의 결백을 믿던 지인과 저널리스트 등의 집요한 추적 끝에 66년 범행 현장에서 카터를 목격했다고 증언한 증인 중 한 명이 당시 진술을 번복했다. 경찰 회유에 넘어가 허위 자백을 했다고 고백한 거였다. 76년 3월 뉴저지 주 대법원은 1심 기소 검찰이 증인들의 거짓말탐지기 판정 결과를 변호인측에 공개하지 않은 사실 등을 문제 삼아 카터와 아티스의 보석을 허용했다. 헤비급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그들의 보석금을 대신 냈다.
하지만 둘은 그해 말 재심 재판에서, 백인 10명- 흑인 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다시 유죄 평결을 받고 두 번째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허위 증언을 자백했던 증인이 다시 말을 바꾼 탓이었고, 검찰이 증오범죄 시나리오 즉, 66년 사건 직전 카터와 친분이 있던 흑인 레스토랑 주인이 백인에 의해 피살된 데 대한 보복 살인이란 범행동기를 제시한 게 배심원 평결의 결정적인 변수였다. 둘은 9개월 만에 다시 무기수로 수감됐다.
사건 초기부터 아티스에게 카터가 주범이라 자백하라고 집중적으로 회유했던 검찰은 밥 딜런 등이 일으킨 무죄 석방 여론과 증인의 진술 번복으로 궁지에 몰리자 아티스를 더 집요하게 공략했다. 첫 가석방 심사 기일(20년)이 5년이나 남아 있던 75년 말, 당시 주지사 보좌관이 감옥의 아티스를 패터슨의 아버지 집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아버지를 마주보고 앉은 아티스에게 "카터가 살인을 저지르는 걸 너는 지켜봤다고 진술만 하면, 장담컨대 2주 뒤면 이 집에 있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직전이었고, 체포된 지 8년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아티스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허위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소리치며, 간수에게 "교도소로 돌아갑시다. 당신들 때문에 하루 수업만 공쳤어"라고 말했다. 71년 교도소 폭동 직후 로웨이 교도소로 이감된 뒤 글래스버러 주립대(현 Rowan University) 비즈니스 스쿨에 등록해 다니던 때였다. 그는 버거씨 병으로 손-발가락을 잃기 전까지 죄수들의 풋볼팀을 이끌며 대학 학위를 땄고, 울분이 쌓이면 교도소에 있던 드럼을 두드렸다. 25년 뒤인 2000년 인터뷰에서도 그는 "당시 회유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라는 거였다. 경찰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팔아넘기고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루터는, 감옥에 갇혀 몸이 썩어드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끝내 진실을 지킨 "아티스야말로 나의 영웅"이라 부르곤 했다.
병이 악화하면서 아티스는 81년 12월 가석방됐고, 이듬해 8월 주 대법원은 그들의 재심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출소한 뒤에도 그는 경찰의 집요한 감시와 견제로 직장을 구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루빈 카터의 변호사였던 "루저들의 변호사" 마이런 벨도크(Myron Beldock)의 생애도 2016년 2월 '가만한 당신'에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법인권 공익단체 '결백프로젝트'와 함께, 카터-아티스 사건을 연방법원에 제소했고, 85년 연방지방법원은 76년의 재심 재판이 "피고들의 중대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했다며 종신형 판결을 무효화했다. 연방지방법원 판사 사로킨(H. Lee Sarokin)은 "76년 검찰의 기소는 이성적 판단이 아닌 인종주의에, 증거 공개원칙이 아닌 은닉에 근거한 결정이었다"며, "만일 피고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고 모든 증거와 사실을 배심원단에게 공개했다면, 평결 역시 달라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 검찰은 항소했지만, 그 판결 직후 루빈 카터는 풀려났다. 가석방으로 이미 풀려나 있던 아티스는 옥에서 나온 카터를 부둥켜안고 "우리가 해냈다"고 말했다.
버거씨병(폐색성 혈전혈관염)은 팔 다리 동맥이 염증으로 막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악화할 경우 손발(가락)을 괴사 시키는 희귀 난치성 질병이다. 아티스는 한 의학저널을 통해 '코카인이 순환기 질병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는 85년 무렵부터 코카인에 의지하곤 했다. 그러다 86년, 코카인 50달러 어치를 지니고 있다가 체포됐고, 경찰은 그의 아파트에서 도난 권총을 발견했다. 그는 버지니아의 지인의 권총인데 언젠가 돌려주려고 보관 중이었다고 진술했다. 경찰과 검찰은, 가뜩이나 미운 털이 박힌 그를 마약 소지가 아닌 유통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연방 1심법원이 무효화한 뒤 검찰이 항소한 살인혐의까지 언급하며, 함께 기소된 코카인 유통조직 두목의 형량과 같은 6년형을 선고했다. 88년 연방대법원이 최종적으로 그들의 무죄를 확정 판결하면서 그를 석방시킨 주 법원 판사는 "패터슨을 떠나라"고 그에게 조언(?)했다.
아티스는 고향 버지니아 포츠머스에 정착, 노퍽(Norfolk)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을 계도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180개월, 780주, 5,478일, 470만 초" 옥살이의 실상을 들려주며, 감옥살이(전과자)에 대한 아이들의 왜곡된 선망을 씻어주곤 했다. 노퍽 소년원 원장 칼턴 베이커(Carlton Baker)는 "아이들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의 말을 듣곤 했다"고 "그는 최대한 많은 아이들을 험한 길에서 벗어나게 돕는 걸 자신의 소명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아티스의 정신상담가였던 의사 아돌프 브라운 3세는 "아티스가 아이들에게 행한 일은 그가 빼앗긴 자신의 청년기 삶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스포츠 스타 루빈 카터가 자서전과 밥 딜런의 노래 등으로 각종 미디어와 여론의 응원과 주목을 받은 반면, 카터의 영웅 아티스는 익명으로, '카터의 친구 누구'쯤으로 밀쳐지곤 했다. 밥 딜런의 장황한 노랫말 어디에도 아티스는 등장하지 않았고, 배우 덴젤 워싱턴이 카터 역을 맡아 2000년 베를린 영화제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탄 노먼 주이슨 감독의 1999년 영화 '허리케인'에서도 아티스는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였다. 2000년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카터가 카메라 세례를 받을 때에도 아티스는 포츠머스의 집에서, 재심 재판 당시 만나 80년 결혼(이후 이혼)한 사회복지사 아내 돌리와 TV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루빈 카터의 평전 '허리케인(The Hurricane: The Miraculous Journey of Rubin Carter)'을 쓴 제임스 허쉬(James S. Hirsch)는 "루빈이 스포트라이트를 즐긴 반면, 존은 완벽히 보완적인 인물이었다. 존은 결코 주목을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아티스 자신도 2014년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내향적 성격이라며 " 내 주된 관심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오명을 벗는 것"이었다고 "단 한 번도 (카터를) 부러워한 적 없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지워진 걸 두고도 그는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고, 주이슨 감독이 그걸 해냈기 때문에 나로선 만족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영화에서처럼 내가 겁쟁이(wus)는 아니"고 " 배심원 평결을 듣고 울지도 않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빛과 그늘처럼 다른 자리에 머물면서도 둘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지이자 서로의 영웅이었다. 카터와 아티스는 강압 수사와 증거조작, 허위 자백과 위증, 형식적인 변론 등으로 수사 재판 과정에 헌법적 권리를 침해당하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이들을 돕는 단체를 이끌거나 함께 가담해 활동했다. 아티스는 2011년 캐나다에서 활동하던 카터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자 곧장 달려가 숨질 때까지 3년간 친구의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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