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지체와 정의의 지연

입력
2021.12.09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 재판 지체는 심각하다. 민사 단독 재판부가 담당하는 2억 원 미만의 분쟁 사건 처리에 평균 225일이 걸린다. 합의부가 처리하는 2억 원 이상 분쟁에는 거의 1년이 걸린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속도가 다섯 달이나 느려졌다. 선거법 사건의 경우 1심은 6개월, 2심ㆍ3심은 각각 3개월로 처리기한을 명시하고 있지만 4년의 피고인 임기 동안 끝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아예 포기해야 할 판이다.

□ 과도한 재판 업무가 지체의 최대 요인이다. 법관들이 처리할 사건이 늘면 늘수록 재판은 지연되기 마련이다. 약 3,000명의 법관에게 연간 새로 부여되는 민ㆍ형사 사건은 464건. 2만 명의 법관이 1명당 89건씩 배당받는 독일은 물론 약 4,000명의 법관에게 150여 건이 할당되는 일본과 비교해도 막대한 양이다. 해를 넘기는 사건까지 합치면 우리 법관들이 한 해 처리할 사건은 500건을 훌쩍 넘게 된다. 소송 폭주는 정의를 지연시키면서 국민 편익을 갉아먹는다.

□ 법관들은 살인적인 업무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5명의 법관이 과로사로 사망했고, 법관 10명 중 6명이 폭주하는 소송을 처리하기 위해 주말에도 근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과도한 소송 업무를 해소하고 재판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법관 증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회는 물론 법원행정처조차 예산을 핑계 대며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법관 수가 늘어난다고 사법부나 법관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적극 나서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 법관들의 잦은 이동도 재판 지체의 한 요인이다. 재판장이 2년마다 교체되는 현재 시스템에서는 사법부 인사 때마다 재판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이달 초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재판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재판장 임기를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6일 전국법관회의에서 의결하지 않는 바람에 제도 개선은 무산됐다. 비공개 회의라 부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속한 재판에 대한 기대를 허문 법관들의 결정이 아쉽다.

김정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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