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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시골에는 ‘슈퍼스타’ K누에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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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꼬물꼬물, 1초에 한 번이나 움직였을까. 무심코 보면 그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부서진 나뭇가지다. 별다른 감흥이 없어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응반끄억(51) 베트남 엔바이성(省) 양잠 협동조합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게 우리 마을의 슈퍼스타입니다.” 눈앞의 나뭇가지는 엔바이성 양잠 농가의 지갑을 가득 채워 준, 한국에서 건너온, 귀하디 귀하다는 '애누에(어린 누에)'였다.
실제로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누에의 삶은 호사로움 자체다. 생산성·크기 등이 월등한 우성 유전자 4개를 한국 기술을 이용, 현지에서 복교잡해 만든 품종명 'TN3' 애누에는 열흘간의 부화기간이 끝나자 폭신한 뽕잎 위에서 식사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내리 3일을 포식한 애누에는 순식간에 6~10㎝ 크기의 고운 흰빛의 큰누에로 탈바꿈했다. 이들이 먹고 있는 뽕잎 역시 한국 기술로 개량한 뽕나무에서 나온다. 엔바이성 뽕나무는 기존 중국 묘목보다 30~40%가량 더 많은 뽕잎을 생산하는 '효자종'이다.
한국 누에를 향한 극진한 서비스는 멈추지 않았다. 행여나 배고플까 부족함 없이 뽕잎을 뿌려 주고, 누에가 좋아하는 건조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군불을 때고 석회 가루도 주기적으로 교체했다. 큰누에가 된 이후 12일 동안 먹는 뽕잎의 양이 전체의 70%를 차지하다 보니, 이 시기에 부지런하지 못하면 질 좋은 실크 원자재(누에고치)를 얻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렇게 곱게 자란 누에는 부화 24일째, 한국이 지어 준 공동사육장 내 '섭'(부화장)으로 천천히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농민들을 먹여 살릴 누에고치를 틀에 채우곤 나비가 돼 훨훨 날아갔다.
15년간 누에를 키웠다는 끄억 조합장은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기 바빴다. "예전엔 집에서 중국산 누에를 각자 키워 조금씩 실을 뽑았다. 그런데 지난해 한국이 TN3 애누에를 보급하고 뽕나무도 새로 심어준 이후 수입이 두 배 이상 늘었다.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베트남 양잠 농가들의 한국화는 '지배자' 중국의 갑질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됐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 '큰형님' 노릇만 하는 중국은 베트남에 양잠 산업의 시초가 되는 누에 알 전수를 계속 꺼려 왔다. 그 결과 베트남 양잠농가들은 매년 거액을 주고 중국산 누에 알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달리, 중국은 베트남의 양잠 산업 홀로 서기 시도를 애초부터 차단했다는 얘기다. 베트남 양잠연구센터 관계자는 "인건비가 급격히 오르면서 최근 중국도 양잠 산업 확장과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베트남 양잠 농가를 하청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시도가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 우리도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간절함은 길을 만드는 법. 적절한 멘토를 찾던 베트남 앞에 현지에서 한국 농업 기술을 전수하는 농촌진흥청의 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KOPIA)팀이 선물처럼 나타났다. KOPIA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에 한국 농업 기술을 전수해 현지인들에겐 농업생산성 향상을 안겨 주고, 한국엔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해외에 진출할 기회를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베트남은 양잠 산업의 자생화를 이룰 수 있고, 한국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공생의 장이 열렸던 셈이다.
결단이 선 양국은 2019년 베트남에서 누에를 두 번째로 많이 키우는 북부 엔바이성을 협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선택했다. 우선 KOPIA는 지난해 엔바이성 쩐옌현 비엣타잉면에 '한국 애누에 양잠시범마을'을 조성, 인근 70헥타르(㏊)의 땅에 한국형 뽕나무를 심었다. 이어 새로운 뽕잎을 먹을 TN3 애누에를 복교잡해 직접 공급하면서, 한국식 양잠 사육 기술과 장비도 제공했다. 시범마을 사업에는 총 290억 동(약 14억5,000만 원)이 투입됐으며, 내년에도 30㏊의 뽕밭을 추가 조성하고 한국형 양잠 참여 농가를 늘리는 데에 관련 예산을 쓸 예정이다.
엔바이성의 '슈퍼스타'로 떠오른 한국 애누에는 현지인들에게 수치로 입증되는 행복을 선사하고 있다. 눈치 보며 산 중국산 누에 품종(LQ2)이 6g의 알에서 10.3㎏의 애누에를 낳는 반면, 같은 알 기준 한국 TN3의 생산량은 11.4㎏에 달한다. 중량으로 따지면, 중국산보다 10% 이상 개체가 많은 셈이다. 성체가 된 큰누에의 활약은 더 크다. 중국산이 누에 한 마리당 787m 길이의 실을 생산할 때 한국산은 1,010m를 뽑아냈다. 같은 뽕잎을 먹은 한국 누에가 무려 22%나 높은 생산성을 보인 것이다. 실크의 품질도 향상됐다. 대나무 틈에 누에고치를 만들게 하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KOPIA가 보급한 회전형 격자식 섭을 사용하면서 상(上)품 누에고치가 줄지어 만들어졌다.
엔바이성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실크는 불티나게 팔렸다. 실제로 500가구의 KOPIA 시범마을 주민들은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10억7,253만 동(약 5,36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가구당 매월 최소 26만 원 이상을 벌어들인 셈이다. 한화 기준으로 "그게 무슨 큰돈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엔바이성 농가의 월 평균 소득은 252만 동(약 12만6,000원)에 불과하다.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한국으로 방향을 잡은 농가들은 적어도 이웃 마을 주민보다 두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는 의미다.
베트남 전역이 한국형 양잠 산업을 성공적으로 이식받으면 K농업 또한 새로운 길이 열린다. 우선 표면적으로 해외에 안정적인 양잠 생산 거점이 구축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1970~80년대만 해도 농촌에 흔했던 양잠 농가를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최근 국내 양잠업계는 '직접 생산'보다 수입 누에고치를 소재로 한 실크 비누 등 미용, 수술용 실 제작 등 '의료 산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양국의 양잠 산업 공생이 계속될 경우, 생산망 확보와 유관 산업 글로벌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단지 희망 사항이 아니다. 양국의 농업 교류는 이미 차곡차곡 모범 사례를 쌓아가고 있다. 앞서 베트남 고원에 위치한 지방정부들은 KOPIA가 2009년부터 보급한 무와 참외 등을 키워 4배가량의 생산성 향상을 이룬 바 있다. 맛과 품질이 뛰어난 한국 농산물에 대한 현지 입소문은 수출 증가로도 자연히 이어졌다. 2017~2020년 한국 채소의 베트남 수출 실적은 동남아시아 최대인 11만 달러(약 1억3,000만 원)다. 베트남에 유입된 물량은 이후 인접국으로 퍼져 나갔다. 현재 KOPIA는 한국 딸기, 땅콩, 감자, 버섯 등의 재배 기술도 베트남 각지에 전수하며 또 다른 성공 모델을 만들고 있다.
베트남의 협업 의지도 강하다. 쩐년현 엔바이성 공산당 서기장은 지난달 23일 현지에서 열린 '한국-베트남 양잠 시범사업 애누에 공동사육장 준공 기념식'에서 "한국과 함께 향후 1,000㏊ 이상의 뽕나무 재배지를 확장하고, 연간 150톤의 실크 관련 제품 생산이 가능한 공단을 건설하기 위해 최근 투자 정책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개도국에 대한 무상 공적원조(ODA)를 일방적으로 받는 입장이었으나, 앞으로는 사업 파트너로 함께 가자는 취지다.
남은 숙제는 내년 종료될 양잠마을 시범사업을 어떻게 계승·발전시키느냐의 문제다. 현종내 KOPIA 베트남 사무소장은 7일 "양잠 사업을 베트남 전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선, 우리 정부가 한국형 잠종장(누에 알 생산 시설) 보급과 국내 업체의 현지 진출 등을 지원하는 추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렵게 뿌리 내린 씨앗이 더 큰 나무로 클 수 있도록 이제 한국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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