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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기다리는 동안...독일의 늦수확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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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아직도 까치밥 같은 포도가 가지에 매달려 남아있는 포도밭이 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포도 수확은 보통 8월 말부터 시작해 9월이면 끝난다. 그런데 10월, 11월, 심지어 기온이 영하 8도로 떨어질 때까지도 포도를 남겨둔 곳들이 있다. 포도의 천연 당도를 높여 달콤한 와인을 만들기 위함이다.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 이른바 ‘늦수확 와인’은 1775년 독일 라인가우 지역의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에서 탄생했다. 역사적 발견이 대개 그러하듯, 늦수확 와인 역시 뜻밖에 ‘우연히’ 빚어낸 결과물이다.
너무 익은 와인의 반전
당시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는 풀다 대수도원 관할이었다. 이곳에서는 대수도원장이 허가해야만 포도를 수확할 수 있었다. 포도가 한창 익어가는 어느 날, 포도밭 담당 수사가 수확 허가를 받아올 전령을 풀다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전령이 함흥차사였다. 하필 그해에는 날씨가 좋아 포도가 빨리 익은 터라 일부 포도는 썩고 있었다. 달리 방도가 없어 수사들은 전령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수사들 속이 애타다 못해 썩어갈 무렵이었다. 고대하던 전령이 돌아왔다. 다른 해보다 무려 2주나 늦은 시점이었다. 그사이 포도는 너무 익어 예년처럼 신선한 와인을 기대할 수 없었다. 때를 놓친 농부의 표정을 한 수사들은 과숙해 볼품없는 포도로 와인을 빚어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와인의 향과 맛이 더 깊고 달콤한 게 아닌가. 와인을 맛본 풀다 대수도원 수사는 감탄하면서 비결을 물었다. 그가 들은 답은 “슈페트레제(Spätlese·늦수확)”였다. 이때부터 독일에서는 당도 높은 포도를 얻기 위해 수확을 늦게 했다고 한다.
사실 독일은 포도를 재배하기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니다. 기후 탓에 포도가 잘 익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프리미엄급 와인의 등급 체계가 여타 기준이 아닌 포도 성숙도(당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독일 와인의 여섯 가지 신세계
독일에서는 와인을 크게 ‘테이블 와인’과 ‘품질 와인’으로 분류한다.
테이블 와인에는 도이처바인(Deutscher Wein)과 란트바인(Landwein)이 있다. 이 둘은 대중적인 와인으로 맛과 가격 역시 그러하다. 주로 독일 내에서 소비된다.
품질 와인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체계가 복잡하긴 하나 대략 두 등급이 중요하다.
먼저, 크발리테츠바인(Qualitätswein). 이 등급의 와인은 독일 13개 지역에서 생산된다. 와인법이 바뀌기 전의 옛 명칭을 줄여서 ‘쿠베아(QbA)’라 부른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등급으로, 쿠베아급 와인은 가성비가 뛰어나 접근성이 좋다.
그다음은 프레디카츠바인(Prädikatswein)으로 쿠베아급 중에서도 우수한 와인에 부여되는 최고등급 와인이다. 다른 등급의 와인은 가당(加糖)을 허용하지만, 프레디카츠바인은 포도의 천연 당분만으로 발효해 만들어야 한다. 주로 리슬링 품종으로 만드는데 다른 품종을 쓰기도 한다.
프레디카츠바인 등급은 수확 당시 포도 성숙도를 기준으로 다시 6개 단계로 나뉜다. 카비네트―슈페트레제―아우스레제―베렌아우스레제―아이스바인―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 순으로 당도가 높다.
①카비네트(Kabinett)는 정상 수확기에 잘 익은 포도를 따 만든다. ‘귀한 와인’이라 특별히 ‘카비넷(캐비닛)’이라는 셀러에 두고 마셨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리슬링 특유의 미네랄과 흔히 석유 냄새로 표현되는 페트롤 향은 물론, 청사과·레몬·라임·살구 등 과일향에 꽃향이 어우러져 가볍고 상쾌하며 향긋하다. 맛은 약간 달콤하거나 드라이한 스타일로 생산된다.
②슈페트레제(Spätlese)는 ‘늦수확’이라는 명칭 그대로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카비네트보다 당도가 높고 바디는 묵직하며 풍미는 깊다. 미네랄과 페트롤 향에 살구·복숭아 같은 핵과류향과 꽃향이 느껴진다. 맛은 대부분 약간 달콤하지만, 잔당을 남기지 않고 만든 드라이한 스타일도 있다.
참고로 ①과 ②는 레이블에 단맛이 없으면 트로켄(Trocken), 살짝 단맛이 있으면 할프트로켄(Halbtrocken)이나 파인헤르프(Feinherb)라 적혀 있다. 그냥 카비네트나 슈페트레제라 적혀 있으면 단맛이 있는 와인이다.
③아우스레제(Auslese)는 ‘선별’이라는 명칭 그대로, 잘 익은 ‘포도송이’를 선별 수확해 만든다. 포도송이에는 잘 익은 포도알뿐만 아니라 귀부균이 내려앉은 포도알도 섞여 있다. 이 포도로 와인을 빚으면 슈페트레제보다 달콤하다. 향과 맛도 더 깊을 수밖에 없다. 미네랄과 페트롤 향은 물론 살구·열대과일·꽃향에 꿀향도 느껴진다. 대부분 달콤한 스타일로 만들지만, 드물게 잔당을 남기지 않고 발효해 트로켄 스타일로도 만든다.
④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BA)는 귀부균에 감염돼 당도가 높아진 포도알(베렌)을 한 알 한 알 골라(아우스레제) 따서 만든다. 그러니 달콤하고 맛이 깊을 수밖에 없다. 미네랄과 페트롤 향은 물론 열대과일향, 말린 살구향, 오렌지 마멀레이드향에 깊은 꿀향과 꽃향이 난다. 귀부균에 감염된 포도알만 골라 따서 만들다 보니 생산량이 무척 적다.
⑤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TBA)는 최고 당도의 와인이다. 트로켄은 건조하다는 뜻으로, 이 등급의 와인은 특히 귀부균의 역할이 중요하다. 귀부균이 포도알에 미세한 구멍을 내면 포도의 수분이 증발해 포도알이 쪼글쪼글해진다. 이런 포도알만 골라 만든 와인이다. 오렌지 마멀레이드향, 말린 살구향, 열대과일향에 향긋한 꽃향과 꿀향이 난다. 달콤한 향이 어우러진 가운데 미네랄과 페트롤 향이 치고 올라온다. 향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실감케 하는 와인으로 신들의 음료 넥타르에 비유될 정도다. 독일의 TBA는 프랑스의 소테른, 헝가리의 토카이와 더불어 세계 3대 귀부 와인으로 불린다.
⑥아이스바인(Eiswein)은 언 포도를 수확해 만든다. 기온이 영하 8도 이하로 떨어질 때 포도를 수확하면, 포도 수분이 얼어 당분이 더욱 농축된다. 이를테면 당분만으로 와인을 빚은 셈이니 맛이 꿀처럼 달콤하다. 아이스바인용 포도의 당도는 베렌아우스레제와 비슷하다.
정리하자면, 카비넷·슈페트레제·아우스레제는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고, 베렌아우스레제·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는 귀부균에 감염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다만, 아이스바인은 귀부균에 감염되지 않은 과숙한 포도를 자연에서 얼려 만든다.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아이스와인 칼럼을 참조하시라.
평지 아닌 ‘68%의 경사’가 키운 포도
몇 해 전 필자는 슈페트레제의 전설이 탄생한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를 방문했다. 마당에 ‘슈페트레제’의 전령 동상이 서 있었다. 사실 당시 전령이 왜 늦게 돌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수도원장이 사냥에 나선 터라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둥,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서 늦었다는 둥 여러 설이 나돌지만, 진실은 달콤한 와인 속에 숙성되어 내려올 뿐이다.
와이너리를 찾았으니 응당 와인을 맛보았다. 와이너리를 여행할 때 와인을 주는 족족 마시면 취해버리기 일쑤다. 대개는 코와 입으로 향을 흠뻑 음미하고는 뱉어낸다. 하지만 그날 머금은 와인은 뱉을 수 없었다. 포도밭 광경을 본 뒤였기 때문이다.
독일 모젤이나 라인 지방의 포도밭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평지에 있는 포도밭은 극히 드물다. 포도밭 경사가 대부분 45%에서 60%, 심지어 68%에 이른다. 비탈이라기보다 절벽에 가까운 경사지에서 자라는 포도나무와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면 절로 경외심이 든다. 스릴을 느끼려면 놀이동산 말고 독일 포도밭으로 가라는 지인의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었다. 험한 자연환경에 깃든 포도와 인간이 함께 빚어낸 와인을 도저히 뱉을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독일은 북위 50도,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나라다. 이 때문에 포도가 여물려면 일조량 확보가 중요하다. 그곳 사람들이 강가의 돌이 많은 가파른 남향 경사면을 포도밭으로 택한 까닭이다. 강물에 반사된 햇빛 덕분에 포도밭에 볕이 더 많이 든다. 기온이 내려가는 밤에는 낮 동안 온기를 품은 강이 따뜻한 공기를 순환시킨다. 또 돌 역시 품은 온기를 포도나무에 나눠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테루아르가 불리하지만은 않다. 밤에는 찬 공기가 이슬을 맺고, 아침에는 강 안개가 피어오른다. 낮에는 볕이 들어 따뜻하고 살살 바람도 부니 귀부균이 내려앉아 알맞게 포도의 당분을 농축시키기 좋은 환경이다. 귀부균은 곰팡이균으로, 학명으로는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고 한다. 이 균 덕분에 포도가 ‘귀하게 부패한다’고 해서, 귀부(貴腐)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어로는 노블롯(Noble Rot), 독일어로는 에델포일레(Edelfäule)라 부른다.
독일 와이너리에서 황지우 시인이 떠오른 이유
필자가 방문한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가운데 하나다. 그 역사가 8세기 카롤링거 왕조 카롤루스 대제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카롤루스 대제는 다른 곳보다 쌓인 눈이 먼저 녹는 언덕을 보고는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817년에 이르러서는 그곳에서 와인이 생산되었다. 1100년경에는 베네딕토 수도회가 그 땅에 수도원을 세워 세례 요한에 봉헌했다. 1716년에는 풀다 수도원에서 수도원을 매입해 ‘성(슐로스)’을 짓고 교회를 개축했다.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란 이름이 이렇게 탄생했다.
1720년 이 와이너리는 포도밭에 리슬링 품종 포도를 심었다. ‘리슬링의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슈페트레제를 처음 생산했다. 게다가 1858년 세계 최초로 상업적으로 아이스바인을 출시했다. 한때 메테르니히가 이 와이너리를 소유하기도 했다. 빈회의에서 성과를 낸 공로를 치하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가 하사한 것이다. 그 뒤 폭탄 테러로 파손되기도 했으나 복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마도 지금쯤 독일 와이너리의 와인 저장고에는 프레디카츠바인 등급의 와인이 발효 중이거나 발효를 마치고 익어갈 것이다. 포도밭에는 아이스바인을 빚을 포도만 덩그러니 매달려 찬 바람 속에서 달콤하게 얼고 있겠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빚어지는 늦수확 와인을 보노라면, 황지우 시인이 썼듯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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