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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가 독일 화가? 칸딘스키는 러시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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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는 독일 사람인데 왜 러시아 화가로 소개하나요?” 러시아 미술에 관한 강연을 할 때면 단골손님처럼 돌아오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의 요지는 칸딘스키가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기에 독일 화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분들은 같은 이유로 칸딘스키를 프랑스 화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출신의 독일 화가, 또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이것이 칸딘스키에 대해 국내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인식이다.
반문해 보자. 백남준은 독일 예술가일까, 미국 예술가일까? 칸딘스키를 독일이나 프랑스 미술가로 보는 시각대로라면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한국의 예술가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백남준이 엄연히 한국의 예술가이듯, 칸딘스키 또한 러시아의 예술가이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출생지나 활동무대가 어디인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평생을 통틀어 지녀오던 정신적 정체성과 창조성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문제다.
칸딘스키는 1866년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계 집안은 퉁구스카의 왕족이었던 간티무로프 공작가이며 부계 집안은 콘딘스크 공국의 만시족 계통 지도층으로서 칸딘스키라는 성은 여기서 유래한다. 양가 모두 시베리아의 아시아계 유목민족 지배층의 후손으로, 칸딘스키가 자신의 핏줄에 대해 지닌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가 유럽에서 활동할 때 자신이 시베리아 왕족의 후손임을 의도적으로 부각해 스스로를 소개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유럽인들에게 러시아는 동방이었으며 저 먼 시베리아의 왕족 혈통이라니 얼마나 신비로웠을까. 이러한 유럽인들의 기대에 화답하듯 칸딘스키의 작품들은 러시아적 요소들로 가득하다.
1900년대 중반 제작된 그의 초기작에서 보이는 고대 러시아 테마와 이후 추상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색채와 형태는 1889년 러시아 북방민속탐사에서 접한 코미족 사람들의 전통 장식 문양에서 그가 받은 충격의 영향으로 읽힌다. 이는 원래 법학자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가 당시 기준으로 거의 중년의 나이인 30세에 미술로 진로를 바꾸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특히 ‘즉흥’과 ‘구성’ 시리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정교회 사원 및 카자크 병사들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색채들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이 지닌 러시아적 근원을 보여주는 예시이며, 후기 작품에서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태와 색채 또한 그 근원에 러시아 북방에서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도 러시아 미술계와의 교류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해 귀국한 그는 혁명 이후 정부 기관에서 중책을 맡으며 자신이 꿈꾸어오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 개조에 착수한다. 칸딘스키가 이룬 러시아에서의 가장 큰 예술행정적 업적은 1919년 회화문화박물관을 개관한 일이다. 이 기관은 20세기 미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세계 최초의 미술관으로서 뉴욕현대미술관(MOMA)보다 10년 앞섰으며 수도인 모스크바 외에도 전국에 22개의 분관을 두고서 추상미술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였다. 1921년 독일의 바우하우스로 떠나기 전까지 러시아에서 칸딘스키가 미술가이자 이론가, 예술행정가로서 남긴 유산은 지대하다.
칸딘스키가 러시아를 떠난 이유는 추상미술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 학문으로 정립하려는 그의 이상을 이루기에는 당시 고국의 상황이 너무나도 열악했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에 이은 혁명과 내전으로 러시아의 경제는 파탄상태였고 물자 부족으로 인해 젊은 미술가들은 생산적인 미술, 즉 실용품 디자이너가 되기를 원했다. 곧이어 이어진 스탈린 정권의 전위미술가들에 대한 탄압은 그의 귀국길을 영영 막아버렸다. 독일에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치는 1933년 바우하우스를 폐쇄하고 전위미술을 퇴폐미술로 낙인찍었다. 칸딘스키는 쫓겨가듯 프랑스로 떠나 그곳에서 눈을 감아야만 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칸딘스키가 어쩔 수 없이 거쳐 간 도피처였을 뿐 그의 창조적 정신의 근원이 향해 있는 곳은 늘 러시아였다. 다만, 그의 원대한 예술적 이상을 펼치기에는 러시아가 너무 작은 나라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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