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 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친구들 한국 방문기를 그린 TV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독일에서 온 다니엘의 친구들은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매 끼니까지 계획에 맞춰 움직인다. 크리스티안의 친구들은 발길 닿는 대로 끌리는 대로, 멕시코 식으로 즐긴다. 좀 늦게 가면 어떤가, 재미있으면 됐지. 칠레인 제르의 여동생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생사가 달린 일도 아닌데 굳이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나. 꽉 짜인 일정은 숨이 막힌다.
물론 중남미 사람들도 계획이 있다. 12월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말구유로 집을 장식한다. 건물 로비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자리 잡는다. 아파트 건물 트리 아래에는 경비 아저씨와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들을 위해 입주자들이 선물을 둔다. 직접 구운 과자, 와인, 자기 형편에 맞는 선물을 준비한다. 누구 선물이 더 좋네, 비싸네, 뒷말은 없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12월 초부터 1월 7일 동방박사의 날까지, 중남미 최고의 명절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등 남반구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시작되면 여름 휴가철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휴가 기간은 보통 2,3주. 직원들이 번갈아 휴가를 가도 다른 직원이 업무를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각자 맡은 업무가 있다. 당연히 일의 속도는 더 더뎌진다. 상류층은 진작부터 미국이나 유럽으로 떠날 여행을 준비한다. 벤하민(가명)의 가족은 여름 휴가철마다 유럽 곳곳을 둘러본다. 카탈리나(가명)는 런던, 베를린 등에서 한 달 정도를 지낸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돌 때도 있다. 한적해진 도시에는 추위를 피하려는 북반구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외여행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들도 나름대로 휴가를 즐긴다. 집에 있으면 어떻고 버스를 타고 근처 바닷가나 산에 간들 어떠한가. 어차피 능률도 안 오르는 남반구의 뜨거운 여름, 쉬어야지. 휴가철이 지나면 은행에는 대출 광고가 뜬다. 여름 휴가 때 사용한 카드 대금을 갚을 때다.
코로나19로 상황이 달라졌다. 국경은 봉쇄되었고 1~2월에 해변과 트레킹, 7~8월에 스키를 즐기러 오던 북반구의 관광객들도 뜸해진 지 오래다. 심지어 칠레 관광산업은 2019년 대규모 시위 발발 이후 3년째 거의 개점휴업 상태다. 휴가를 즐기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 시국에도 상류층은 마이애미로, 멕시코로, 국내 휴양지와 별장으로 틈새 여행을 떠난다.
파트리시아(가명)는 남자친구와 마이애미에서 칠레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감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좋다. "재밌었어요. 어차피 다 나아서 괜찮아요." 여행하는 상류층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개개인의 삶은 다르다. 카르페디엠, 순간을 누리면 된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답답하게 볼지라도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산다고 안쓰러워할지도 모른다.
도미니카공화국, 에콰도르, 칠레 등 중남미 3개국 수장과 11명의 전 지도자가 판도라페이퍼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일로 칠레의 피녜라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 처했으나 하원 투표 부결로 위기를 모면했다. 12월에는 극우 카스트, 극좌 보리스 후보의 대통령 결선 투표가 있다. 시위는 더욱 거세질 게다. 아르헨티나는 기록적 인플레를 경신 중이다. 베네수엘라, 브라질, 페루 등 곳곳의 정치 상황도 녹록지 않다. 경제 파탄, 불안정한 정치, 기후변화, 코로나19로 뒤숭숭한 남미에 잔인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카르페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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