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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아름이'가 남자라면... 미러링해본 이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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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회상해본다. 어려서 더 좋아했던 것은 글쓰기보다 만들기였다. 색종이와 빈 박스, 폐건전지, 휴지심 같은 것을 오리고 붙여서 바다 속 상상의 세계를 만들었다. 집에 혼자 남으면 은밀히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욕조 물속에서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그때는 휴대폰 말고 가정용 무선 전화기가 있었다) 초에 불을 켠 채로 냉동실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풍선껌을 잔뜩 씹고 뱉어서 국자에 녹이면 어떻게 될까?
돋보기로 검은 비닐봉지를 태워보기도 하고, 단단한 기반암이 나올 때까지 텃밭을 계속해서 파보기도 하고,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실로 묶어 두었다가 다음 날 개미 떼가 그의 몸을 온통 뒤덮은 것을 보고 경악하기도 했다. 인형 놀이도 물론 좋아했지만 시크릿 쥬쥬 인형보다 스포이드, 자석, 철가루, 꼬마전구와 전선 등이 들은 과학 상자를 얻었을 때 더 신났다.
초등학교를 지나면서도 여전히 과학이 무척 재미있었다. 자연스레 이과를 택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물리와 화학을 심화과목으로 택했다. 물리를 심화과목으로 택한 반에 여학생 수는 적었다. 그리고 자연과학대에 진학하여 지질학을 공부했으나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는 과학사를 공부했고 이후엔 작가로 살고 있으니 이제 전통적인 의미의 과학 연구를 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회상해본다. 과학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 차츰 사라진 걸까? 언제부터 과학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과학 공부를 그만하라고 명시적으로 강요한 사람은 분명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과학 연구의 중심보다는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가. 왜 직업으로 과학이나 공학을 택하지 않았는가(혹은 못했는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2017년 우리나라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에 따르면 한국 전체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 중 여성은 20.1%이며 이 중 정규직 인력만 따지면 16%로 그 수가 더 적다. 이러한 상황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심화하는데 전체 관리자 중 오직 9.5%만 여성이며, 여성 연구과제 책임자 비율은 10.2%에 불과하다.
왜 이공계에 여성의 수가 적은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가장 흔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과학/공학/수학에 적성이 맞지 않아서. 하지만 난 분명 과학을 좋아했고 또 잘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른 진로를 택했다. 이 공백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며 다음과 같은 세상을 한번 상상해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가 되면 여자애들은 대체로 PC방에서 논다. 거친 욕설을 경쟁하듯 뱉어내며 게임을 한다. 여자 친구 중 몇몇은 컴퓨터를 무척 좋아하고 잘 다룬다. 또 다른 여자 친구 중 한 명은 어려서부터 과학 영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학교 내에서 천재 이미지를 가졌다. 그녀의 부모님은 물론 학교 선생님, 학급 친구들 모두 그녀의 천재성에 자주 감탄한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과학자나 공학자는 대부분 여자다. 그들의 외모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문성을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 특히 물리학, 기계 공학, 컴퓨터 과학은 여성들의 리그다. 여성들은 논리력과 추리력이 강하고 이성적이며 수학과 과학에 소질이 있지만,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하고 섬세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화 속엔 세상의 윤리와는 담을 쌓고 오로지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더벅머리의 미친 여성 과학자가 나온다.
과학에 소질을 보이던 여학생은 과학고 혹은 영재고에 진학한다. 공부 잘하는 남학생은 과학고보다는 외국어고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고 학생의 대다수는 여자다. 똑똑하고 죽이 잘 맞는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또래 문화를 형성한다.
게임도 하고 프로그래밍 실력을 키워서 학교 시스템에 해킹을 시도하며 일탈의 즐거움을 느끼다 징계를 받기도 한다. 악동 경험이 쌓일수록 유대감이 커진다. 남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여학생들은 전교의 모든 남학생을 잘 알고 있다.
여학생들은 자기네들끼리 모이면 남학생의 외모를 품평하고 등급을 매긴다. 여학생 중 누군가가 매력적인 남학생과 연애를 시작하면 그녀는 거의 영웅이 된다. 친구들에게서 질문 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남학생과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은근히 자랑스럽게 뽐내며 말한다. 여자 사회의 거친 분위기 속에서 남학생들은 섞여들기 힘들어한다. 모멸감을 느낄 때마다 남학생은 속으로 다짐한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더 똑똑하면 되겠지. 실력으로 증명하겠어.
그렇게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여자가 압도적 대다수다. 남자가 공대에 다닌다고 하면 늘 질문을 받는다. 그 학과에 남학생이 몇 명이나 돼? 너 정말 인기 많겠다? 과제 대신해주겠다고 호구 자처하는 여자들 엄청 많겠다. 너 MT 올 거지? 뒤풀이 올 거지? 우리 운동 동아리 들어올래? 매니저 자리가 비었거든.
여자가 공대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떠올린다. 컴퓨터 앞에서 코딩만 하느라 며칠 감지 않은 머리, 체크무늬 남방, 맨발에 슬리퍼 질질, 뿔테 안경, 심각한 거북목, ET 배, 그리고 사회성 떨어지는 성격.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 여자. 그래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갑자기 걸어 다니는 위키백과가 되는 여자. 누군가 중간에 끊지 않으면 말을 멈추지 않는 여자.
세상은 그런 여자를 두고 너드라고 부른다. 인터넷에서 이들을 희화화하는 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안경 쓴 여자 너드의 부족한 사회성을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시트콤이 있고 그곳엔 여자들보다 똑똑하진 않지만 섹시하고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자 너드가 섹시한 남성 캐릭터에게 어쭙잖게 플러팅하는 것이 시트콤의 핵심 웃음 포인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면 더 좋다.
진짜 격차는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다. 여자들은 그다지 능력이 출중한 것 같지도 않은데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들 중 몇몇은 창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취업한다. 남자들은 취업 시장에서 선호되지 않는 편이다. 대학원에서도 진정한 연구자 취급을 받지 못할 때가 잦다.
남자들은 면접 자리에서 듣는다. 우리 연구실은 무거운 것도 많이 들어야 하고 거친 일이 많아서 남자가 들어오면 내가 마음 편히 못 시키겠던데…. 결혼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이는 갖고 싶으신가요?
그 와중 여자들은 출산 이후에도 회사 일에 집중하여 착실히 경력을 쌓아간다. 그녀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건 집에서 애를 봐주고 집안일을 도맡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집에서 애만 보니 얼마나 편하고 좋니, 잘 나가는 아내도 두고 장가 잘 갔다, 역시 남자는 결혼을 잘 해야 한다. 애는 역시 아빠가 키워야지. 남편의 외조 덕에 너드 같던 아내는 빛도 좀 나고 세련되어졌다.
남자는 심각한 여초 사회를 버티고 버텨서 간신히 공대를 졸업했지만, 대학원에 들어가니 성차별이 더욱 심하다. 존경하던 여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는데 남자를 대하는 여교수의 태도가 어딘가 늘 찜찜하다. 성희롱 발언을 듣고 고민이 돼 이를 동료에게 털어놓았는데 연구실 내에 꽃뱀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제대로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도망치듯 학계를 떠난다.
뒤늦게 취업을 하려 했지만 어렵다. 나이 많은 남자를 뽑으려는 회사가 많지 않다. 그렇게 전공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그나마 남자가 많은 직종을 택해 취업한다. 남자가 많으니 반가웠지만 곧 깨닫는다. 남자가 많은 직종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저평가 받고 임금을 적게 받는다는 것을. 그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출근한 어느 날 남자는 깨닫는다. 이것은 내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는 것을. 더 열심히 공부한다고, 더 똑똑해진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왜냐하면, 여자들은 그들만의 리그, '진짜 전문가'의 세계에 한 번도 진지하게 남성을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들에게 그는 동등한 동료, 똑똑한 친구, 번뜩이는 천재가 아니라 그저 '공대 아름이'였음을.
상상이 너무 과했을까? 짧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길어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공계 버전의 미러링 스토리를 쓰면서 통쾌하고 시원했다. 위의 이야기는 여자와 남자만 바뀌었을 뿐 실제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썼다. 사실은 현실이 훨씬 더 잔혹하고 슬퍼서,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오히려 가짜 같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요컨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해 취업하거나 학업을 이어나가는 모든 과정에서 이공계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교육/제도/취업/지식 등 모든 차원에서 아주 촘촘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이러한 차별은 대단히 교묘해서 당사자는 분명히 느끼고 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점이 차별받는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차별에 홀로 대항하긴 어렵고 반드시 함께 대처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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