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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에게 반성은 사치였다"... 전두환, 끝내 사죄 없이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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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ㆍ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씨가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반란의 수괴’,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총으로 말살한 ‘학살 책임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싹을 10년 넘게 짓밟은 ‘독재자’는 단 한 줄의 반성문도 남기지 않고 90년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지난달 숨진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씨의 죽음으로 핏빛으로 물든 한국 현대사의 한 장(章)도 마침표를 찍게 됐다. 하지만 끝내 사죄 없이 떠난 전씨는 ‘진정한 화해’란 숙제를 남겼다. 아물지 않은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것도, 5ㆍ18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도 이제 산 자들의 몫이다.
전씨는 최근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해오다 이날 오전 8시 40분쯤 자택에서 쓰러졌고, 30분 뒤 경찰이 사망을 확인했다.
전씨의 생은 한국 ‘민주주의 동면’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가 1952년 육군사관학교(11기)에 들어가면서 비극은 태동했다. 군인 전두환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ㆍ16군사정변 지지를 시작으로 군 내부 정치에 의존해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씨가 쟁취한 최고 권력도 정당성은 없었다. 자신이 만든 사조직 ‘하나회’가 중심이 돼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12ㆍ12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이듬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끌어내리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시 헌법을 뜯어고쳐 ‘7년 단임 대통령제’가 담긴 5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체육관 선거로 군사독재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합법을 가장한 쿠데타 주역에게 시민들은 충성하지 않았다. 국가폭력의 서슬은 여전했다. 그리고 결과는 1980년 5월 광주를 유린한, 용서받지 못할 집단 학살극으로 나타났다. 진상규명돼야 할 발포 명령으로 희생된 이는 공식 통계만 606명에 이른다.
퇴임 후 행보도 뻔뻔함 그 자체였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법원이 재임 기간 갈취한 2,205억 원을 토해 내라고 했지만, “수중에 29만 원밖에 없다”는 궤변으로 국민을 또다시 기만했다. 급기야 말년엔 회고록을 통해 발포 책임을 부인하며 직접 진실 조작과 은폐를 시도했다.
전씨는 마지막까지 아름답지 못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 생애 마지막 말은 이게 전부였다. 측근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민주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남긴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죄를 물으려면 시간ㆍ장소를 특정해 물으라”며 적반하장 태도로 일관했다.
청와대는 전씨의 명복을 빌면서도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도 없었던 점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조문ㆍ조화도 하지 않는다. 여야 대선후보들을 비롯, 정치권 역시 조문을 거부했다. 반성 없이 세상을 등진 독재권력에게 당연히 국가장도, 국립현충원 안장도 허락되지 않는다.
유족은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ㆍ재용ㆍ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27일 오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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