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편안한 죽음에 광주는 오월 넋을 향해 울었다

입력
2021.11.23 14:48
수정
2021.11.23 18:3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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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 한마디 못 들어 명복 못 빌겠다"
"노태우는 사과 시늉이라도 했는데…"
5·18단체들 "죽음으로 진실 못 묻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모습.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모습. 연합뉴스

"솔직히 명복은 못 빕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광주는 슬펐다. 그러나 그 슬픔은 전두환씨가 아니라 오롯이 오월 영령들을 향해 있었다. 전두환씨의 죽음에서 41년 전 군홧발과 총칼에 무참히 쓰러진 희생자들의 절규가 오버랩된 탓이다. 여기엔 끝내 광주 학살에 대한 '(내란 목적) 살인자'의 사죄를 듣지 못했다는 한(恨)과 분노도 응축돼 있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그에게서 사죄 한 마디 들을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게 억울합니다." 이날 오후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 앞에서 만난 고모(57)씨는 "전두환씨 사망 소식에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역사의 현장에 나왔다"며 "전씨가 이렇게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게 사과를 기대했던 세월이 원망스럽다. 오늘은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겨울비에 젖은 민주광장을 지나, 5·18민주화운동 당시 '죽음의 거리'였던 금남로에서 마주친 시민들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았다. 시민들은 모두 5·18 유족이라도 된 듯 저마다 울분을 토해냈다. 이진수(52)씨는 "시간은 언제나 정의의 편인 줄 알았는데, 전두환씨 사망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며 "그는 결국 광주를 향해 총칼을 거두지 않은 채 죽었다"고 핏대를 세웠다.

전두환씨의 죽음에 한 달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소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전모(70)씨는 "광주학살 범죄자이자 친구인 노태우씨는 아들이라도 보내 사과하는 시늉이라고 냈는데, 전두환은 그마저도 없었다"며 "그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자"라고 말했다.

광주지역 시민단체들은 '전두환의 편안한 죽음'에 분노했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성명에서 "5·18을 능멸한 독재자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의 불행이고 부끄러움"이라며 "정부는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에 대한 용서와 추모를 강요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용서와 사과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그래도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한 뒤 거짓 사과한 자가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일침했다.

지역 정치권도 "역사의 죄인 전두환에게 죽음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분개했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국가와 국민에 반역한 전두환에게는 어떠한 애도도 적절치 않다"며 "150만 광주시민은 전두환의 국가장 등 어떠한 국가적 예우도 반대 입장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광역시 5개 구청장도 "전두환에 의해 짓밟혔던 1980년 5월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며 "광주 학살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파괴의 수괴인 전두환이 사망한 작금에, 5공 학살 세력들은 지금이라도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진실을 밝혀달라"고 촉구했다.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5·18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은 이날 "오월영령들을 모독하고 폄훼하면서 역겨운 삶을 살았던 학살자 전두환은 지연된 재판으로 결국 생전에 역사적 심판을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죽었다"며 "그러나 죽음으로 진실을 묻을 수 없으며,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전두환의 범죄행위를 명백히 밝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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