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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소리 난다는 그 산... 순한 길만 골라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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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악(嶽·岳)’자 들어간 산은 험한 바위산이다. 설악산 월악산과 함께 치악산이 대표적이다. 높을 뿐만 아니라 가파르다. 웬만한 마음먹지 않고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꼭대기에 오르면 아래서는 볼 수 없는 장쾌한 풍광이 펼쳐지고, 그만큼 뿌듯한 성취감이 벅차 오른다. 힘들게 오르다 보면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오만함은 사라지고 대자연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진다. 그러나 꼭 정상을 찍어야 맛일까. 높은 산일수록 품도 넓다. 골짜기 자락 길은 큰 산의 기운과 동시에 숲의 아늑함을 품고 있다. ‘악’ 소리가 절로 나고 ‘치’를 떨며 오른다는 치악산에서 순한 길만 골라 걸었다. 원주 시내에서 동북쪽, 소초면 구룡사 인근 치악산 탐방 코스를 소개한다.
치악산은 1984년 국내 16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적악산으로 불리다가 ‘은혜 갚은 꿩’ 이야기와 관련해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상원사 동종에 얽힌 전설이다. 가장 높은 비로봉(1,288m)을 중심으로 남대봉과 향로봉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능선을 이루고 있다. 국립공원 대부분은 원주시에 속하지만 동쪽 일부는 횡성·영월군과 접하고 있다. 10여 개 등산로 중 구룡코스도 횡성에서 가깝다.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구룡탐방지원센터까지는 약 8㎞ 거리다.
탐방로 입구에 구룡사가 버티고 있다. 문화재관람료(3,000원)를 내야 한다는 의미다. 주차장은 매표소 바깥에도 있고, 사찰 경내에도 있지만 다행히 주차료는 따로 받지 않는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왼쪽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 새긴 바위가 있다. 궁궐 건축에 사용하는 목재(황장목)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채를 금지한다는 표시다. 계곡 어디에나 흔한 크지 않은 바위에 대충 새긴 것처럼 보여 왕명의 권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치악산에는 이곳 외에 구룡마을 입구와 정상 부근에 각각 하나씩 더 있다. 황장목은 속이 누렇고 단단한 질 좋은 소나무다. 치악산은 조선시대 황장목 보호림 가운데서도 이름난 곳이었다. 강원감영이 가까워 관리에 용이하고, 남한강 물길을 이용해 한양으로 이송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다.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구룡사까지 가는 길은 차도와 인도로 구분된다. 계곡을 따라 걷는 인도에는 ‘황장목 숲길’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소나무 군락이 제법 운치 있고, 일부 구간 목재 덱이 깔려 있는 평탄한 길이다. 소나무를 제외한 활엽수는 이미 나뭇잎이 거의 떨어져 맨 가지를 드러냈다. 그만큼 낙엽이 쌓인 길이 푸근하고 아늑하다. 계곡에도 색 바랜 나뭇잎이 내려앉아 바위틈을 흘러내리는 하얀 물줄기가 더욱 선명하다. 사각거리는 낙엽을 밟고 가는 가을 나들이가 쓸쓸하지 않다.
그렇게 1㎞ 남짓 순한 숲길을 걸으면 구룡사에 닿는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치악산에 절을 세우려는 한 스님이 있었다. 명당을 골랐는데 대웅전을 세울 자리가 하필 연못이었다. 이곳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치솟으니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스님의 반격이 이어진다. 부적 한 장을 연못에 던지니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용이 도망친 연못을 메우고 마침내 절을 세웠다.
여기까지 들으면 구룡사(九龍寺)여야 마땅한데, 지금 절 이름은 거북이 끼어들어 구룡사(龜龍寺)다. 조선시대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 공납했다고 한다. 구룡사 주지스님이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견물생심이라 주민들에게 뇌물까지 받아 챙기니 절간 살림은 나날이 풍족해졌지만, 수도 도량의 명성은 퇴색되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스님의 제안으로 입구의 거북바위를 쪼개 없앴더니 오히려 신도가 줄고 거찰의 명성도 잃어 절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거북바위가 절의 혈맥이었다는 다른 도승의 조언을 받아들여 절 이름에 거북 구(龜)자를 쓰게 된다. 자세히 보면 사찰 입구로 통하는 다리 중간에 거북 조형물이 다시 세워져 있다.
구룡사 터는 이 좁은 골짜기에서 그나마 시야가 트인 지형이다. 계단을 올라 보광루에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원근감을 이루며 겹겹이 펼쳐진다. 창문으로 보이는 모습이 사계절을 담은 풍경화다.
절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계곡을 따라 탐방로가 이어진다. 약 700m 상류 금강솔빛생태학습원까지 골짜기는 깊어지는데 길은 한결 더 순하다.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이 모든 소음을 삼킨 듯 고요하다. 이끼를 잔뜩 머금은 돌무더기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만 유난히 청아하다.
가장 공을 들였을 생태학습원 구간 탐방로는 역설적이게도 걷기에 가장 불편하다. 얼기설기 모양을 낸 보도블록 틈새로 자꾸 발목이 기울어진다.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우니 공연히 헛돈 쓴 셈이다. 생태학습원 주변 자연관찰로는 옛날 화전민 마을이었다. 층층의 다락밭 흔적과 집터의 돌무더기가 일부 남아 있다. 집과 들을 연결하던 오솔길을 걸으면 이웃 마실 가듯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생태학습원 위쪽에 3개의 돌탑이 보인다. 치악산 정상 비로봉에 올라야 볼 수 있는 미륵불탑(용왕탑·신선탑·칠성탑)의 축소 모형이다. 전망이야 턱없이 부족하지만 산정에 선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라는 의미다.
여기까지가 순한 평지길이다. 이곳에서 1.4㎞ 위의 세렴폭포까지는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다. 그래도 계단 하나 없이 천천히 오르는 길이니 산행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가팔라진 주변 산세만큼 계곡은 더 깊어진다. 골바람이 부는 날은 또 다르겠지만, 양쪽으로 협곡을 이루고 있으니 분위기는 더욱 아늑하고 평온하다. 잎사귀를 훌훌 털어낸 나뭇가지가 맨몸을 부대끼며 숲을 이루고, 이제 곧 그 대열에 합류할 잎갈나무만이 수명을 다해가는 형광등처럼 군데군데서 누런 빛을 뿌리고 있다.
세렴폭포는 이정표마다 표시돼 있어 대단한가 싶었는데, 2단으로 떨어지는 작은 물줄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계곡에서 본 수많은 물줄기에 비하면 오히려 운치는 떨어진다. 본격적인 등산은 이곳부터 시작된다. 세렴폭포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25~35도의 급격한 경사를 이룬다. 세렴폭포는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거나 급경사를 내려온 등산객이 두루 쉬어가는 장소다.
지난 5월 치악산 자락을 한 바퀴 두르는 치악산둘레길 11개 코스가 모두 개통했다. 전체 139.2㎞에 이르는 걷기길로 삶의 체취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흙길, 숲길, 물길, 마을길을 연결했다. 둘레길이라 해도 자체가 험한 산이니 일부 구간은 거칠고 투박한 치악산의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룡사 부근에서는 2코스 구룡길과 3코스 수레너미길이 연결된다. 전 구간을 걸으려면 해발 600~700m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어야 하지만, 시작과 끝 지점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둘레길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2코스 구룡길은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국립공원 구룡탐방지원센터 주차장 바로 아래서 시작해 흥양리 제일참숯까지 이어지는 7㎞ 길이다. 과거 학곡리 주민들이 장터나 학교를 오가기 위해 사용하던 옛길이기도 하다. 전체 구간을 걸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옛길과 숲길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다.
길은 시작되자마자 산자락을 오른다. 경사가 만만치 않은데, 곧바로 짙은 잣나무와 전나무 숲이 나타난다. 지그재그로 연결되는 길모퉁이 곳곳에 쉴 수 있는 평상이 놓여 있다. 주변이 갈색으로 변해가는 계절이라 푸른 숲이 더욱 생기가 넘친다. 빽빽한 침엽수림이어서 눈이 오면 한층 멋을 더할 숲이다.
3코스 수레너미길 시작 지점(물론 반대편에서 걸으면 종점이다)은 구룡길 입구에서 약 4㎞ 떨어진 한다리골 마을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개울을 건너면 바로 조붓한 숲길로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가는 낙엽 쌓인 길로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약 1.4㎞ 지점에 뜬금없이 숲속 놀이터가 나타난다. 빽빽한 잣나무 숲에 짧은 쇠줄타기 기구와 오두막을 설치한 것이 전부다. 놀이터보다는 명상 쉼터가 더 어울릴 듯하다.
3코스 순한 길은 여기까지다. 이곳부터 수레너미재까지는 경사가 심하고 특히 고갯마루를 앞두고 약 10분간은 숨을 헐떡일 정도로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개 너머는 횡성군 강림면이다.
수레너미재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스승인 운곡 원천석을 만나기 위해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치악산 매화산과 천지봉 사이 고갯마루다. 수레너미길 반대편 끝은 태종과 운곡의 설화가 남아 있는 태종대 바위다.
수레너미길 자체는 더없이 한적하고 푸근하지만 접근이 불편하다. 초입의 화장실 부근 길가에 3~4대의 차를 댈 수 있지만, 정식 주차장은 아니다. 좁은 마을 길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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