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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세' 애관극장,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극장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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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은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가 정설이었다. 조선황실이 고종 재위 40주년 축하 행사를 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이후 다양한 연구를 통해 그보다 10년 앞선 1892년 이미 극장이 운영 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인이 만든, 일본인들을 위한 인천의 '인부좌(仁富座)'였다. 국내 최초의 극장이되, 우리 극장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 손으로 설립한 최초의 극장은 무엇일까. 정동 협률사와는 다른 한자를 쓰는 '협률사(協律舍)'다. 1895년 인천 중구 경동에 문을 연, 지금의 애관극장의 전신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로 상업영화를 상영한 해에 우리 손으로 만든 극장이 문을 열었다.
애관극장의 전신인 경동 협률사는 정동 협률사보다 7년, 1907년 문을 연 종로의 단성사보다는 12년이 앞선다. 정동 협률사가 우리나라 최초 국립극장이라면 경동 협률사는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공연장이라는 게 영화사·극장사 전문가들 얘기다.
경동 협률사는 부산 출신 사업가 정치국이 세웠다. 향토사학자 최성연이 1959년 쓴 책 '개항과 양관 역정'에 따르면 협률사는 청일전쟁(1894~1895) 중 지어진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다. 연극장으로 출발한 협률사는 이후 '축항사(築港舍)'로 이름을 바꿨다가 '애관(愛館)'으로 개명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관극장에 걸려 있는 연표를 보면 협률사는 1911년 축항사로 명칭이 변경됐다. '신극사 이야기'를 쓴 안종화(안용희)에 따르면 연극단체 '혁신단'의 임성구 단장이 이름을 지었다. 축항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1년 지역 인사 홍사헌이 인수하면서 '애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15년 혹은 1924년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으나 신문 기사 등에 '애관'이 첫 등장한 것은 1921년이다. 애관의 관자는 '집 관(館)'자이지만 '볼 관(觀)'자로 잘못 알려져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애관극장은 영화관이자 연극장이었다. 이곳에선 연주회, 강연 등도 열렸다. 축항사에서 애관극장으로 바뀌던 시기 관람료는 가장 비싼 좌석이 1원, 가장 싼 좌석이 50전이었다고 한다.
애관극장은 1927년 신축됐다.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었다. 1930년에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발성영화 '야구시대'가 상영됐다. 1935년 연간 극장 입장객이 15만 명을 돌파했다. 1940년대 애관극장에선 남조선 무용예술 콩쿠르, 올림픽 파견 레슬링 경인대시합 등이 열렸다. 1948년에는 배우 최불암의 부친인 최철 건설영화사 대표가 제작한 영화 '수우'가 상영됐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유명한 가수 한명숙 선생의 데뷔 무대도 애관극장이다.
애관극장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함포사격으로 반파됐으나 이후에도 극장 영업을 이어간다. 1954년 건물을 신축하고 이듬해 피아노 거장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내한공연을 유치했다. 애관극장은 1960년 신축 후 400석 규모 극장으로 재개관했다. 개보수를 여러 번 거치면서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현재의 외벽을 철거하면 과거 모습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7월 영화 '옥자' 개봉 당시 무대 인사차 애관극장을 찾았던 봉준호 감독은 "역사 깊은 극장이라는 사실을 와서야 알았다. 죄송스럽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 투자를 받아 만든 옥자는 당시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들의 상영 거부로 개인 극장에서만 상영됐다.
개인, 영화수입사 등 주인만 10번가량 바뀐 애관극장은 1972년 황해도 출신 사업가 탁상덕 사장이 인수했다. 현 애관극장 탁경란(58) 대표의 부친이다.
1989년 인천 최초로 70㎜ 영사기와 입체음향설비를 갖춘 상영관(현재의 1관)이 개관했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였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조지 루카스 필름의 기술자들이 내한해 직접 시공했다.
극장에 대한 탁 사장의 애정은 대단했다. 그는 생전 탁 대표 등에게 "다 팔아도 애관극장은 팔면 안 된다"고 자주 얘기했다고 한다. 탁 사장 시절 단관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관람객 60만 명을 유지한 배경이다.
탁 대표는 2000년부터 애관극장을 맡아 운영했다. 그는 오빠들이 운영하던 극장이 외환위기 등으로 부도를 맞자 미국 유학 중 귀국해 경매에 나온 극장을 다시 사들였다. 당시는 상영관만 14개인 전국 최대 규모 멀티플렉스인 CGV인천14가 문을 연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탁 대표는 2004년 애관극장을 1개관에서 5개관으로 증축해 멀티플렉스와 경쟁에 나섰지만 과거 전성기를 되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오성극장을 비롯해 동방 인형 키네마 등 경동 일대 시네마 거리를 지키던 극장들이 멀티플레스에 밀려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미림극장 정도가 명맥을 유지했다.
근래 넷플릭스 등이 등장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겹쳐 존폐 위기에 빠져 있다. 운영비 절감을 위해 규모가 가장 큰 1관의 문을 닫기도 했다. 가장 오래돼 역사가 곳곳에 스며 있는 2층 구조의 1관은 지난달 애관극장을 주제로 한 윤기형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보는 것을 사랑한다' 개봉에 맞춰 다시 열었다.
애관극장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은 1935년부터 4대째 이어오고 있는 국내 하나뿐인 단관 극장 광주극장처럼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라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탁 대표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극장 경영도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서다. 애관극장이 건설사에 매각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2018년 처음 결성된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애사모)'에 따르면 애관극장은 코로나19 사태로 관람객 발길이 끊겨 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적자를 보고 있다. 현재 부채가 35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애관극장 관람료는 20년째 그대로이다. 성인 기준 7,000원, 조조 5,000원으로, 멀티플렉스의 반값이다.
애관극장을 2015년부터 취재해온 윤기형 감독은 "탁 대표는 극장이 그대로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며 "공공 매입 외에는 극장을 지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애관극장이 프랑스 파리 시립 영상문화원 '포럼 데 이마주(Forum des Images)’와 같은 복합문화공간이 되길 원한다는 개인적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애사모 관계자도 "코로나19로 적자를 보면서도 관람료 인상 없이 버텨온 극장"이라며 "공공 매입이 잘 마무리돼 민간 자본에 매각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천시는 5월 27일 인천시의회, 애사모와 함께 '애관극장 보존 및 활용을 위한 민관협의체' 첫 회의를 여는 등 극장을 공공자산으로 취득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현재는 '신중 추진'으로 한 발 물러나 있다. 민관협의체는 최근 공공 매입과 공공문화공간 활용을 골자로 한 권고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활동을 마무리해 인천시 판단만 남은 상태다.
인천시는 극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전·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시민 의견 수렴과 공론화를 위해 지난달부터 세 차례 건축가, 문화예술인, 시민단체 활동가, 지역상인, 주민 등이 참여하는 원탁회의를 열었다.
시 관계자는 "회의 결과와 이달 말 나올 기본활용 방안 및 역사·문화적 가치평가 연구 용역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르면 연내 극장 매입 여부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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