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쁠수록 쉬어야 한다는 말의 역설

입력
2021.11.19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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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여섯 시. 가슴을 찌르는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토. 이제는 내장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고 느낄 때까지 토를 한 후에는 그저 고통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책을 펼쳤으나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예술영화를 켰지만 은근한 전개 사이로 고통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렇게 에너지가 없을 때 필요한 건 자극적인 소재로 빠르게 전개되는 장르의 드라마다. 그마저도 에너지가 없을 때는? 어두운 방 침대에 모로 누워,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몇 초 정도의 짧은 영상 클립을 본다. 누군가 곡예를 넘고, 자동차가 하늘을 난다. 짧은 영상에 취해 시간이 가는 걸 잊는다. 옆에서 고양이가 내가 보는 영상을 따라 보고 있다. 평소 같았다면 '네가 뭘 알고 보냐' 싶었겠지만, 움직이는 물체를 멍하니 좇는 나는, 지금 고양이로소이다.

에너지가 없을수록 깊이 있는 콘텐츠를 즐기기 어렵다. 휴가를 받아 푹 쉬고 난 후에는 진짜로 시간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권도 야심차게 펼쳐볼 기운이 있다. 하나 야근으로 얼굴이 회색빛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웃긴 밈이나 몇 초짜리 영상을 보는 게 전부다. 시간을 죽이는 동안 사색이 끼어들 여유는 없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쁜 지금, 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

발자크는 '현대생활의 발견'에서 현대 풍속이 세 계층의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일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이에 따라 세 개의 존재방식이 만들어진다. 바쁜 삶, 예술가의 삶, 우아한 삶. 근면이 미덕인 시대에, 발자크는 과감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아한 삶을 칭송한다. 일에 길들여진 인간은 우아한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의 아포리즘의 첫 구절엔 이런 문구가 있다.

"문명적이든 원시적이든, 삶의 목적은 휴식이다."

휴식을 삶의 목적으로 꼽은 사람이 하나 또 있다. '게으름의 찬양'을 쓴 버트런드 러셀이다. 정작 그는 논리학자, 수학자, 철학자 등으로 부지런하게 산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언제나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라 강조했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며 근로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 칭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짧게 요약된다.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져라."

바빠 죽겠는데, 왜들 이렇게 쉬라고 하는 걸까? 돈 버느라, 노후준비 하느라, 사회생활 하느라, 인플루언서가 되느라, SNS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루를 몽땅 바쁜 일에 소진한 후에는, 생각할 기력도 없이 귀여운 고양이나, 칼 같은 군무를 보며 쓰러지는 데 말이다.

우리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하루를 끝내고 자리에 누워 사색을 즐길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삶은,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을 끊임없이 떠나는 자의 일상을 닮았다. 그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그곳으로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그가 허둥거리며 뛰어다닌 하루 동안 무엇을 즐겼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앞으로, 앞으로 갈 뿐이기에 사실 여행자라기보다는 방랑자에 가깝다. 훗날 향유하는 삶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더 쥐어보려 하지만, 어쩌면 순서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향유해야만, 훗날 무엇가를 쥘 수 있는 게 아닐까?


박초롱 딴짓 출판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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