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4시 30분 서울 노원구 월계동 한 아파트 공터. 7년째 단지 내 동네고양이(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케어테이커' 윤 모(74) 할아버지가 "흰둥아" 하고 부르자 고양이 모녀가 나타났다. 엄마 고양이 '엄마'(4세 추정)와 딸 '흰둥이'(2세)다. 이날 동물권 행동단체 카라는 이 지역 길고양이 중성화(TNR)를 위해 고양이 모녀가 밥을 먹는 장소를 포함, 고양이 급식소(밥을 주는 자리) 10여 곳에 포획틀을 설치했다. 케어테이커들이 고양이를 포획틀로 유도하기 위해 이틀째 밥을 주지 않아 고양이들은 배가 고픈 상태였다. 엄마와 흰둥이는 낯선 사람과 포획틀의 등장으로 거리를 유지한 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윤 할아버지는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는데 동네고양이들이 종량제 봉투를 뜯는 모습을 보고 밥을 주기 시작했다"며 "엄마는 구내염을 앓고 있는데 잡힐지 걱정이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양이 캔과 고등어 통조림, 대표 간식 '추르'까지 들어 있는 포획틀이 놓인 지 10분 만에 첫 번째 고양이가 들어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엄마'였다. 활동가들은 엄마의 흥분을 낮추기 위해 우선 천으로 포획틀을 덮고, 임신이나 수유 중인지 확인했다. 이 경우 중성화 수술을 하기 힘들어서다. 엄마는 구내염이 있지만 상태가 심하지 않아 중성화수술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됐고 이동을 위해 차량으로 옮겨졌다.
재개발 지역과 이주 목표지 고양이 모두 중성화해야
이날 4시간에 걸쳐 포획된 고양이는 암컷 5마리와 수컷 2마리 등 모두 7마리.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암컷 고양이는 1, 2세로 어린 개체였다. 활동가들은 암컷 고양이가 많이 포획된 데 내심 안도했다. 고양이 개체 수 조절에 수컷보다 암컷의 중성화가 효과적이서다. 고양이 7마리는 이틀 뒤인 6일과 8일에 걸쳐 중성화 수술을 마쳤고, 10일 포획된 자리로 돌아갔다.
이 지역 고양이 중성화는 개체수 급증을 막고, 고양이 간 싸움을 줄이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올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철거에 들어가는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재개발 지역 내 동네고양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할 계획이어서다. 이를 위해서는 이주 지역인 월계동에 사는 동네고양이들의 중성화 수술이 필수였다.
장위동에 사는 고양이 40여 마리는 이미 중성화 수술을 마친 상태다. 재개발 지역 동네고양이 지원을 담당하는 카라 정책실 김정아 활동가는 "재개발 지역에 사는 고양이들을 철거 전 미리 이동시키지 않으면 공사 도중 건물 잔해에 깔려 죽거나 목숨을 건진다 해도 영역을 확보할 수 없어 살아가기 어렵다"며 "장위동의 경우도 철거를 위한 펜스가 설치되기 전 고양이들을 이동시키고, 중성화 수술을 시켰다"고 설명했다.
다음 단계는 재개발 지역 고양이들의 이주다. 김 활동가는 "장위동 고양이들이 이주할 곳을 찾다 인근 월계동 아파트와 연립주택 등에 있는 급식소를 찾게 됐다"며 "고양이들이 이곳에서 정착하며 살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고양이 이주 성공 위해 케어테이커·지자체·조합의 도움 필요
고양이 이주가 성공하려면 먼저 고양이가 사람들이 이주시키려는 곳으로 따라 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케어테이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은 한자리에서 며칠간 밥을 주고 고양이가 적응을 하고 나면 비로소 이주지 방향으로 20m가량 밥자리를 옮긴다. 이런 식으로 '적응'과 '소폭 이동'을 거듭하고 이동 구간에 건물이 막혀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에 이주까지는 최소 1개월, 길게는 6개월이 소요된다. 장위동 재개발 지역에서 월계동 아파트 단지까지 거리는 약 500m. 하지만 중간에 중랑천을 건너야 하는 쉽지 않은 코스라 이번 이주 역시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주 지역에서 이미 고양이를 돌보는 케어테이커가 새로운 고양이 유입을 받아들여야 하고, 기존 케어테이커들도 이주 고양이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해당 구청 담당자, 재개발 조합 등 협조는 물론 지역 주민들의 이해도 필요하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서 재개발 지역 고양이 이주를 도운 봉사자 모임인 '문정냥이'를 이끄는 김세진 대표는 "고양이 밥을 주면 주변이 더러워진다는 민원 발생을 줄이기 위해 케어테이커들이 정기적으로 급식소가 있는 공원을 청소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장위동 고양이들의 경우 기존 케어테이커들이 월계동으로 고양이 이주를 돕고 이동 후에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재개발 지역 고양이 돌봄, 다른 지자체로 확산되길"
이번 재개발 지역 고양이 중성화 지원은 서울시가 2020년부터 실시한 '도시정비구역 동물보호 사업'의 일환이다. 2020년 기준 서울 내 주택정비사업을 준비하고 있거나 진행 중인 곳은 600여 곳에 달한다. 재개발 지역 내 고양이들의 피해가 커지고 이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자 서울시는 지난해 1월 동물보호조례를 개정해 정비구역 내 동물의 구조와 보호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지원할 근거를 마련했다.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은 카라가 지난해 동대문구 휘경동, 관악구 봉천동 등 6곳에서 중성화와 이주를 도운 고양이는 143마리에 달한다. 올해는 동작구 사당동, 송파구 문정동, 성북구 장위동 등 3곳의 재개발 지역에서 65마리의 고양이 중성화와 이주를 지원했다.
시의 지원을 받은 재개발 지역도 예산부족으로 충분한 치료와 중성화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지자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지역이 더 많다. 김정아 활동가는 "재개발 지역 고양이 돌봄은 케어테이커뿐 아니라 지자체, 조합 등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동물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동물을 돕고자 하는 사람을 도와 사람과 동물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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