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멜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입력
2021.11.16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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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라니, 지금은 이질감 없는 단어지만 언젠간 비디오라는 단어처럼 누군가에겐 그저 생경하고 낯선 단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현재의 나로선 미래의 풍경을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멜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기본적인 멜로 영화의 플롯은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거나 혹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관객들이 2시간 분량의 시간 동안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을 하는 주인공들이 당면한 난관 때문에 발생하는 긴장감 혹은 슬픔, 안타까움. 결국 두 주인공이 그 난관을 극복해서 사랑을 성취하거나 혹은 좌절하게 되는 것에 대한 서스펜스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를 통해 각자의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두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장벽에는 신분에 따른 차이 혹은 상대에 대한 오해, 성격 차이 등 여러 요소가 있는데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며, 이 지형에 변화가 생겼다. 난관을 해결하는 방식에 필연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기다림이나 엇갈림의 시간이 주는 낭만이 이제는 손쉬운 방식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손편지를 주고받거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동전을 넣어가며 통화를 하거나 상대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 언제 올지 몰라 카페에서 성냥으로 탑을 쌓으며 그를 기다리다가 만나게 되는 기다림의 시간들은 아날로그적 요소들에서 기인한 풍경이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연락이 가능하며, 심지어 상대의 위치를 확인할 수도 있다. 상대가 문자를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고 SNS나 데이팅 어플을 통해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내볼 수도 있다. 진지하고 진중한 관계에 부담을 갖고 가벼운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연락이 쉬워진 만큼 관계를 끊는 것도 가벼워졌다. 이렇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것에 장벽이 생기고 말았다. 디지털의 방해 공작들을 피해 가며 낭만성을 획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도 더해진다. 사랑만을 좇기엔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의 피로감과 그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가치들도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서부 영화에 유니콘이 등장하는 것처럼 허무맹랑하게 비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고백하자면 여전히 내게는 사랑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연락을 주고받는 방식, 사랑을 소비하는 모든 패턴이 변화를 맞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믿는다. 더없이 행복하다가도 나조차 몰랐던 나의 밑바닥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고. 이별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그 감정의 파고들을 사랑이 아니면 어디서 어떻게 겪을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하고 있는 나는 현재의 방식 안에서 어떻게 사랑의 본질을 담아낼지에 대한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앞에 놓인 난관보다 내 눈앞에 놓인 과업을 해결하는 것이 더 거대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현 시대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대해, 여전히 지난하고 힘든.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영화로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한 질문을 함께 나눌 수 있길 희망한다.


윤단비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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