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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는 죄가 없다

입력
2021.11.13 04:30
22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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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은 계절의 우리말이다. 자연 현상은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으로 되풀이되지만 매년 새로움을 준다. ‘봄철’에서 ‘겨울철’로 이어지고, 비에 따라 ‘장마철’과 ‘가뭄철’도 보여준다. 꽃이 피는 ‘꽃철’, 단풍이 물드는 ‘단풍철’, 산에 오르기 좋은 ‘산철’, 생선이 많이 나는 ‘생선철’, 사냥을 할 만한 ‘사냥철’ 그리고 ‘추수철’ 등은 때에 따라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철’에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라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일의 이치를 판단하는 힘이 생겼다면 ‘철들다, 철나다’라 하고, 반대로 사리를 분별하는 지각이 없으면 ‘철없다, 속없다, 지각없다, 철모르다, 철부지(不知)’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철이 들까? 철의 본뜻에 비추면, 때에 맞춰 찾아오는 무수한 시간을 지내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역어인 ‘철알다(제주), 혜미들다(함북), 속들다(전남)’ 등은 생각의 무게를 말하고 있다. 때가 지나 늦게 든 ‘늦철’도 있다.

철이 되면 노랫말처럼 산과 들이 바뀌며 시절을 알려준다. ‘제철 과일, 제철 나물’ 등 ‘제철’에 나온 음식을 보약과 비하랴. 한창 성한 때 ‘한철’에는 다들 농번기 일꾼들처럼 일해야 하는데, 바쁜 가운데 얻는 ‘겨를때’를 즐길 수 있음도 고마운 일이다. 제철이 지난 ‘철 지난 옷’, 철에 뒤져 맞지 아니하다는 ‘철겨운 부채질’과 같은 말도 있다. 혼인만 해 놓고 오래도록 신랑 집에 가지 않고 있다는 ‘철 묵은 색시’, 필요한 때에는 없다가 소용이 없게 되고 나서 생긴 ‘철 그른 동남풍’과 같은 우리말도 재미있다.

철 따라 피고 지는 ‘철꽃’이 있고, 나비와 매미, 그리고 귀뚜라미 등 ‘철벌레’도 있다. 그리고 철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는 ‘철새’가 있다. 제비나 꾀꼬리, 기러기와 학은 대표적인 철새다. 철새는 권력의 향배에 따라 힘있는 곳을 왔다갔다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철새족’은 실제로 그러한 무리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철새들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 움직일 뿐, 여건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은 아니다. 무리 속에서 규칙에 따라 살고, 먼 하늘길에서는 곁의 새에게 바람의 부담도 덜어 주려는 배려가 있다. ‘제비는 작아도 강남 간다’고 하는데, 목표를 두고 힘든 여정을 제비만큼 끝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철새는 죄가 없다. 철새를 불순하게 보는 것은 인간의 눈일 뿐이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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