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5·18 추모탑 먼 발치서 사과... 광주의 상처는 깊었다

입력
2021.11.10 20: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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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옹호 발언' 사과로 호남 민심 달래기
"제 발언에 상처 입은 모든 분께 머리 숙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0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추념문과 참배단이 있는 추모탑 중간지점에서 고개 숙여 참배를 하고 있다. 광주=이한호 기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0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추념문과 참배단이 있는 추모탑 중간지점에서 고개 숙여 참배를 하고 있다. 광주=이한호 기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10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저의 발언으로 상처받은 모든 분께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전두환 옹호 발언' 논란이 벌어진 지 22일 만이었다.

윤 후보의 사과에도 광주 시민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당초 5·18 민주묘지 내 추모탑 앞에 무릎을 꿇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계획했지만, 윤 후보의 참배를 거부하는 시민들과 오월어머니회 회원 등에 가로막혀 준비한 약 350자짜리 사과문만 읽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무릎 사과'로 진정성 보이려 했지만...

정치권에선 윤 후보가 이날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윤 후보 측도 희생자들에게 예를 표하는 방식 중 가장 진정성 있는 모습이 '무릎 사과'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보수 정당 대표로서 처음으로 지난해 8월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 사과’를 한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전례를 따를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다.

이날 오후 4시쯤 5·18 민주묘지에 도착한 윤 후보는 방명록에 '민주와 인권의 오월 정신 반듯이 세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입구인 민주의 문을 통과해 추모탑을 향하는 동안 현장에서 항의하고 있던 대학생, 시민들과 윤 후보 지지자들이 뒤엉키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일부 시민들은 '욕하지 맙시다, 계란을 던지지 맙시다, 자작극에 말려들지 맙시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자칫 불상사라도 발생할 경우, 윤 후보의 지지층 집결을 위해 역이용당할 수 있다고 경계한 것이다. 계란이나 물병 투척 등은 돌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윤 후보 일행이 민주의 문을 지나 170m 정도 걷는 데 18분이 소요될 만큼 현장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추모탑을 37m 정도 앞둔 자리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참배단 앞에서 오월어머니회 유족들이 참배 저지 농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방문을 항의하는 오월어머니회와 시민들이 충혼탑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광주=이한호기자

10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방문을 항의하는 오월어머니회와 시민들이 충혼탑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광주=이한호기자

윤 후보는 그 자리에 서서 준비한 사과문을 낭독했다. 그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제 발언으로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고 운을 뗐다. 이어 "저는 40여 년 전 5월의 광주 시민들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눈물로 희생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며 "광주의 아픈 역사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됐고, 광주의 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그러기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5월 광주의 아들이고 딸"이라며 "제가 대통령이 되면 슬프고 쓰라린 역사를 넘어 꿈과 희망이 넘치는 역동적 광주와 호남 만들겠다"고 말했다. "국민 통합을 반드시 이뤄내고 여러분께서 쟁취하신 민주주의를 계승·발전시키겠다"고도 했다.

윤 후보는 사과문 낭독과 약식 참배 후 취재진과 만나 "5·18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이고, 우리 헌법 가치를 지킨 정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헌법이 개정될 때 헌법 전문에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며 "(사죄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제가 계속 갖고 가겠다"고 했다. 또 "직접 분향하지 못했지만 사과와 참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했다. 현장 도착 35여 분 만에 참배단 먼 발치서 약식 참배 후 발길을 돌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0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추모탑과 묘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참배광장에서 묵념을 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광주=이한호기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0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추모탑과 묘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참배광장에서 묵념을 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광주=이한호기자


생각보다 깊은 상처로 '호남 민심 달래기' 무산

윤 후보가 참배를 하지 못한 것은 예견된 바다. 이날 5·18민주묘지 주변에는 윤 후보의 방문을 반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입발린 소리 필요없다, 광주 더럽히지 마라' '5·18부정, 모욕! 전두환 닮은 꼴! 광주시민 한 뜻으로 거부한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광주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은 지난 7월 광주를 방문해 민주묘지에 참배한 윤 후보와의 차담회를 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 윤 후보의 참배가 예정된 추모탑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윤 후보는 앞서 전남 화순군의 고(故) 홍남순 변호사 생가를 방문해 민주인사로서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유족들과 차담회를 열었고 광주 5·18자유공원을 방문했다. 그는 이날 정운천 의원, 김경진·송기석 전 의원 등 호남 출신 전·현직 의원들을 대동했으나, '호남 민심' 달래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김현빈 기자
광주= 박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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