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족 보행 상인, 신호등 인간… “길 위에서 행복”

입력
2021.11.11 04:30
<58> 거리의 사람들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 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블록엠 스퀘어에서 코코넛주스를 파는 아우린다씨.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거리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타인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언행을 통해 세상을 읽습니다. 풍족하진 않아도 행복합니다. 비록 적은 돈이지만 가족들을 먹이고 동료들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거리는 다채롭다. 마천루와 숲이 공존하고, 현재와 과거가 어우러진다. 사람 냄새가 정겹다. 독특한 직업, 거리를 일터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하루 벌이가 우리 돈 8,000원 남짓이지만 길에서 돈을 벌고, 가족을 먹이고, 꿈을 꾸고, 삶을 배운다.

인도네시아의 첫 데카콘인 승차공유업체 고젝 본사.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2억7,000만 인구의 인도네시아는 평균 연령 29세의 청년 국가다.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10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을 각각 가리키는 유니콘과 데카콘 기업이 5개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을 정도로 역동적인 나라다. 도로 정체는 '교통 지옥'이라고 불릴 만큼 최악이다. 그럼에도 이방인 눈에 색다르게 생계를 꾸리는 이들이 거리를 살갑게 채운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모나스 광장의 독립기념탑.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그들의 삶을 부족하나마 담는다. 모나스(Monas) 광장의 독립기념탑이 자카르타의 움직이지 않는 상징물이라면 그들은 자카르타의 살아 숨쉬는 상징이다. 팍 오가, 수피르 바자이, 프다강 카키 리마, 이름도 낯선 그들을 만나 보자.

'신호등 인간’ 팍 오가

팍 오가 수기씨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칼리바타 국립영웅묘지 앞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최근 남부자카르타의 칼리바타 국립영웅묘지 정문 앞. 도로가 붐비기 시작하자 한 사내가 질주하는 차들과 오토바이들을 몸으로 가로막는다. 위험해 보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차로 중앙에 선 사내가 정지 손짓을 보내는 사이 다른 사내가 반대쪽에서 유턴하려고 길게 늘어 선 차량과 오토바이를 안내한다. 유턴하게 된 운전자들이 사내에게 동전을 건넨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드문 자카르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이다. 교차로나 유턴 지점, 차량이 대로로 빠져 나오는 길목에 어김없이 신호등 대신 그들이 있다. 직접 도로로 나와 몸짓과 수신호로 교통 정체를 다소나마 풀어주는 존재다. 대부분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일한다. 운전자들이 건네는 100~1,000루피아(80~800원) 동전이 이들의 수입이다. 하루 벌이는 5만~10만 루피아(약 4,000~8,000원)다.

인도네시아 인형극 '운일이'의 등장 인형들. 오른쪽 끝이 팍 오가다. IDN타임스 캡처

흔히 부르는 이름은 '팍 오가(Pak Ogah·실제 발음은 '빡 오가'에 가깝다)'로 '오가 아저씨'라는 뜻이다. 팍 오가 별칭은 1990년대 방영된 TV 인형극 '운일이(Si Unyil)'에서 자신을 지나가려면 100루피아를 달라고 조르는 등장인물 이름인 팍 오가에서 따왔다. 공식 명칭은 교통정리 지원병을 가리키는 수플타스(Supeltas)다. 100(cepek)루피아 또는 푼돈(cepekan)을 받는 경찰(polisi)이라는 의미로 폴리시 츠펙(Polisi Cepek)이라 불리기도 한다. 물론 진짜 경찰은 아니다.

1990년대 방영된 인도네시아 인형극 '운일이'에서 100루피아 동전을 달라고 보채는 팍 오가. 이후 이 이름은 신호등 인간의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팍 오가는 사실 불법이다. 가끔 단속도 이뤄진다. 그러나 혼잡한 교통 흐름을 실시간으로 원활하게 뚫어주는 이들의 효용 가치 덕분에 '무늬만 단속'에 그치는 일이 많고 몇 년 전부터 양성화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경찰서에서 일정 기간 훈련을 받으면 공식 수플타스로 임명하는 식이다.

팍 오가 수기씨가 칼리바타 국립영웅묘지 정문 앞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을 막아섰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압둘 고푸르(40)씨는 2004년 집 근처에서 팍 오가 일을 시작했다. 그는 "직업 자체가 불법이라 여러 번 붙잡혀 갔는데 2년 전 경찰서에서 5일간 훈련을 받은 뒤부터는 마음 놓고 일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동료 10여 명과 두 명씩 짝을 지어 한 시간 일하고 교대한다. 그는 "하루에 보통 5만 루피아를 벌지만 운 좋은 날엔 10만 루피아를 벌고 도시락을 받기도 한다"고 했다. 신통치 않은 날 하루 벌이는 3만 루피아다. 아내와 13, 9세 자녀가 있는 그는 팍 오가 일이 끝나면 온라인 오토바이 기사로 일한다.

칼리바타 국립영웅묘지 정문 앞 도로에서 일하는 수기(26)씨는 "워낙 정리를 잘하니까 경찰이 단속을 하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유족들이 먼저 찾아와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고 했다. 2017년 결혼 뒤 일을 시작한 그는 동료 6명과 매일 12시간씩 일한다. 일과를 마치면 어머니 식당 일을 돕는다.

팍 오가 수기씨가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차량들에 둘러싸여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일의 특성상 적도의 무더위와 호우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게 힘들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사람이다. "마치 동물원에 온 것처럼 욕을 하고 경적을 울리는 일부 극성스러운 운전자 때문에 속상하고 답답하다"(압둘씨), "통제를 무시하고 그냥 가버리는 차들 때문에 위험하다"(수기씨)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도 사람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거나 동전 대신 지폐를 받으면 피로가 싹 풀려요."

길에서 몸으로 때우는 일이지만 꿈과 자부심은 있다. 한결같이 "먹고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고등학생 요가(18)군은 수업이 끝나면 3시간 정도 친구들과 교통정리를 한다. 그는 "더운 날씨와 돈을 주지 않고 가는 운전자 때문에 힘들지만 경찰관이 되고 싶어서 연습 삼아 일한다"고 말했다. 30년 경력의 아간(46)씨는 "세 식구를 부양하고 처지가 어려운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는 조그만 시설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고 뿌듯하다"고 했다.

팍 오가들이 지나가는 차량을 몸으로 막은 뒤 유턴하는 차량을 돕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교통정리 틈틈이 인터뷰에 응한 수기씨가 쉬는 시간이 되자 한참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누군가를 위해 길을 정리하는 일이 자랑스럽습니다. 먹고 살만 하니까 충분합니다. 동료들과 매일 번 돈을 분배하는 시간도 소중합니다. 작은 행복이지만 서로 나눌 수 있으니까요. 길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승차공유업체에 밀린 바자이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블록엠 거리에 늘어선 삼륜차 바자이.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첫 데카콘인 승차공유업체 고젝 본사가 있는 자카르타의 블록엠(Block M) 거리. 파란색 차체에 검은색 지붕을 두른 삼륜차가 늘어서 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삼륜차 기사들은 고젝 헬멧을 쓴 오토바이 기사들이 승객을 싣고 내리는 모습을 멀찌감치 지켜볼 뿐이다. "어쩔 수 없죠. 고젝은 온라인 예약이라 편하니까요. 그래도 우리를 불러주는 고객이 아직 남아 있답니다." 얼마 뒤 손님이 진짜 나타났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블록엠 거리에 늘어선 삼륜차 바자이.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에선 삼륜차를 바자이(Bajai)라고 부른다. 삼륜차 기사는 '수피르(Supir) 바자이'다. 1975년 인도에서 도입됐다. 금속 차체 60%, 지붕 방수포 40%로 운전석을 뺀 최대 정원은 3명이다. 오토바이택시 오젝(Ojek)과 더불어 서민의 발로 각광받았지만 승차공유업체에 밀리는 신세가 됐다.

20년 바자이 운전 경력의 다니씨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블록엠 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20년째 바자이를 몰고 있는 다니(41)씨는 "하루 20만~40만 루피아를 벌 때도 있었지만 이젠 보통 10만 루피아 벌이에 그친다"고 했다. 하루 손님은 5명 정도다. ㎞당 2만 루피아(약 1,600원)를 받는다. 그는 "5년 전 구입한 바자이의 할부금을 매달 갚을 수 있고 나머지를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 굶기지 않으니 만족한다"고 말했다.

발이 5개인 상인들

상인 다리와 수레 바퀴 또는 지지대 숫자를 합쳐 발이 다섯 개인 프다강 카키 리마.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 도심에는 작은 수레를 밀고 다니는 상인이 흔하다. 간단한 각종 먹거리와 음료를 싣고 다니다 적당한 곳에서 장사를 한다. 발(kaki)이 5개(lima) 달린 상인(pedagang)이라는 의미의 '프다강 카키 리마(Pedagang Kaki Lima)'다. 상인의 다리는 두 개지만 수레 바퀴 두 개에 수레 지지대(또는 지지용 바퀴) 한 개를 합쳐 그리 부른다. 대부분 그 작은 수레마저 자기 것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블록엠 거리에서 코코넛주스를 파는 아우린다씨가 직접 코코넛을 자르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아우린다(21)씨는 코코넛주스와 커피를 판다. 시장에서 사 온 코코넛을 직접 잘라 주스를 만든다. 남편도 다른 곳에서 장사한다. 그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 일하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튀김만두 등을 파는 얀토(36)씨는 하루 11시간 일하고 15만 루피아가량 번다. 매일 수레 임대료도 지불한다. 그는 "370만 루피아(약 30만 원)인 수레를 사는 게 꿈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웃었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외곽에서 튀김만두 등을 파는 얀토씨. 자기 수레를 갖는 게 소원이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지금 행복하다"였다. 행복은 어디에 깃드는가, 자문하게 된다.

코코넛주스를 파는 '프다강 카키 리마' 아우린다씨가 웃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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