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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 대리 구매까지 시키는 사장, 자존감 바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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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2019년 11월 5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첫 출근일입니다. 직원이 10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게임회사였지만 저에겐 첫 직장이었습니다. 게다가 정규직이었죠.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부모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2년간의 회사 생활은 제 기대와 너무나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채용공고나 근로계약서에는 분명 '인사총무직'이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입사했던 비서실 사원이 퇴사했다는 이유로 비서 업무도 겸직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동의를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입사원인 제가 거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작 거래처와의 미팅 예약이나 일정 브리핑과 같은 '진짜 비서 업무'는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대표이사는 저를 개인비서처럼 대했습니다. 처음에는 식사 예약을 부탁하는 정도였는데, 점점 정도가 심해지더군요. 수리를 맡긴 차량을 대신 받아오라고 하고, 백화점 명품 매장에 방문해 특정 상품이 있는지 확인해달라고도 했습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됐다며 구매를 지시하더니, 가격이 비싸다며 중고제품 사이트에서 저렴한 물건을 찾아보라는 지시도 했습니다. 비트코인에 투자하겠다며 거래소 이용서약서를 대리로 작성하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 회사가 원래 이런 곳인가 보다 하고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대표는 온라인으로 물건 구매를 지시하면서 자꾸 제 돈으로 먼저 결제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돈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갈수록 금액이 커졌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대표가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대표는 사택에 거주 중이었는데, 이사 갈 새집에 필요한 각종 가전제품을 대리 구매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둘 결제를 하다 보니 1,000만 원이 훌쩍 넘어갔고 한도가 다 되어 더 이상 결제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사와 관련된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다 퇴근 시간을 넘긴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대표는 "사택에서 이사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 업무에 해당하며, 가전제품 구매 역시 나중에 송금을 해줄 텐데 뭐가 문제냐"고 했습니다. 직속 팀장 역시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는 이상 대표의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거부할 근거를 가져오라는 의미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왜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냐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제 행동이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이어서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었습니다. 경력도 얼마 되지 않아 이직을 하기도 쉽지 않았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했습니다. 그러다 1년이 지나고 벌써 2년이 다 되었네요. 그 사이 제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우울증까지 찾아와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과민한 걸까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A씨(20대 여성·게임업체 직원)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우선 입사 직후 비서실 업무를 겸직시킨 인사명령은 법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법원 판례를 보면 인사권은 사용자(대표이사)의 고유권한이므로 업무상 필요한 범위 내에서 상당한 재량이 인정됩니다. 그러나 근로계약서에 업무를 특정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엔 업무를 변경시키려면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따라서 A씨처럼 근로계약서에 ‘인사총무’라고 명시돼 있음에도 비서 업무까지 지시를 하려면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 고려할 부분은 A씨 회사의 조직도를 보면 비서실이 인사총무가 아닌 대표이사 직속의 별도 기구라는 점입니다. 동의 절차가 없는 상태로 소속이 전혀 다른 업무를 지시한 것으로 위법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제19조에는 ‘명시된 근로조건이 사실과 다른 경우에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며 즉시 근로계약을 신청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다만 회사의 취업규칙에 업무를 임의로 변경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을 수 있으니 이 점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A씨가 열거한 비서 업무 중엔 회사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대표이사의 사적인 용무에 해당되기 때문에 당연히 이를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같은 업무 지시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매뉴얼에 보면 ‘사적 심부름 등 개인적인 일상생활과 관련된 일을 하도록 지속적, 반복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직장 내 괴롭힘의 예시로 들고 있습니다.
대표이사의 직장 내 괴롭힘은 회사 내 신고 절차를 먼저 거칠 필요 없이 고용노동청에 바로 신고를 할 수 있습니다. 신고를 할 때는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야 하며 관련 증거가 있다면 첨부해 제출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대표의 사적인 업무지시를 거절했던 문자메시지나 전화 녹음 등의 기록이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택과 관련된 일이니 회사 업무에 해당한다는 대표이사의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사택에서 이사를 간다고 해도 그것은 대표의 개인적인 이사일 뿐입니다. 대리구매를 요청했다는 가전제품은 모두 회사의 자산이 아니라 대표의 개인 집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설사 사택에 필요한 가전제품, 즉 회사의 자산을 구매하는 것이라 해도 이는 회사 비용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지 A씨에게 먼저 결제를 해달라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 과정에서 사택과 관련한 업무가 발생한다 해도 이는 사택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별도로 처리해야 합니다.
또한 퇴근 시간 이후까지 업무를 한 경우가 있었다면 초과근로수당을 지급받아야 합니다. 연장근로는 통상임금의 1.5배를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또한 구체적으로 받은 지시와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데 걸린 시간 등을 입증할 기록은 필요합니다.
여기까지는 법률적인 조언이었고, 외람되지만 추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사건들은 대부분 신입사원, 즉 사회 초년생들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순한 괴롭힘을 넘어 요즘 많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스라이팅'(심리 조작 지배)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 초년생들은 잘 모르니까요. 무엇이 문제이고,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 대표나 팀장도 그 점을 악용했습니다. 사적인 지시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사적인 업무가 회사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포장했습니다. 오히려 A씨에게 왜 개인적 업무이고, 따르지 않아야 하는 법적 근거를 찾아오라 합니다.
A씨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입니다. 회사를 사유물로 생각하고 직원을 수족처럼 부리는 대표가 잘못이고,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이 과정을 거쳐 상황이 나아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깨닫게 됐으니까요.
너무 힘들면 이직을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 인정을 받는다면 자발적 이직을 하더라도 실업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문제가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직장갑질119 법률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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