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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하이마트"...시간을 붙들어맨 64년 음악감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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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역사의 대구 고전음악감상실, 하이마트(Heimat)는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6월 말 문 닫은 대구백화점 본점에서 대구중앙도서관 방향으로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200m쯤 가다 왼쪽 골목길로 20m가량 꺾어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광고판 천지인 동성로에서 골목 앞 허름한 간판을 놓치면 '대략난감'이다. 동성로는 화려했던 하이마트의 옛 영화를, 골목길은 시대에 떠밀린 음악감상실의 오늘을 말해준다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평은 최근 하이마트를 경험하지 않고 하는 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레트로 감성 충만한 이곳은 지금 복고풍 이미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려는 SNS족의 출사지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8일 오전 11시 30분 4층짜리 건물의 3층에 터를 잡은 하이마트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30년간 매주 한 번 고전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소향회' 모임 날이었다. 음악과 함께 청춘을 보냈던 12명은 이후 1시간 반 동안 숨죽인 채 '2006년 베를린필하모닉 유러피안 콘서트'를 감상했다. 3대째 하이마트를 지키고 있는 박수원(50) 오르가니스트로부터 잠시 작품 설명을 들은 회원들은 스트라빈스키의 '3개의 악장으로 된 교향곡'과 베토벤 '교향곡 7번'을 고성능 스피커로 들으며 유럽으로 음악 여행을 다녀왔다. 팔순이 넘은 한 회원은 "아가씨 시절부터 출입했다"고 했고, 육십대 회원은 "음악이 8할, 친목은 2할"이라고 했다. 하이마트가 없었다면 뭉치기 어려웠을 회원들이다.
그랜드피아노 2대, 나팔형 대형 스피커, 푹신한 의자 60개, 한쪽 구석의 음반실, 연주 곡명을 적어놓은 칠판,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 벽면 한가득 음악 거장의 얼굴을 새긴 부조는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하이마트의 브랜드다. 하이마트 2대 대표인 김순희(75)씨와 아들 박수원씨, 며느리 이경은(47)씨가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매어놓은 아날로그 감성의 공간이기도 했다.
1인 헤드셋 음악감상 시대가 닥친 지 오래지만 이 가족은 365일 변함없이 문을 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구를 강타한 작년 2월부터는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꿋꿋하게 문을 열고 있다. 김순희 씨는 "음악을 나누라는 아버지 말씀을 따라 청춘을 다 바친 하이마트를 어떻게 닫겠느냐"고 반문한다.
독일어로 '고향'이란 뜻의 하이마트(Heimat)는 한국전쟁이 잉태한 공간이다. 김씨의 아버지 김수억(1969년 작고)씨는 서울에서 목재상을 하다 6·25전쟁 때 대구로 피란했다. 당시 트럭 한가득 싣고 온 것은 돈이 생길 때마다 사다 모은 SP(Short Play), LP(Long Play)판이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처제 도움으로 태평양을 건넌 앨범이었다. 자식만큼 귀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김수억씨는 서울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사이 앨범이 한옥 툇마루가 내려앉을 정도로 불었고, 서울로 온전히 옮길 자신이 없었다. 기타 연주로 음악계를 주름잡던 그가 대구의 문인, 화가, 음악가 사이에서 '대구에선 없어선 안 될 인물'이 된 것도 이유였다.
향촌동의 한 다방에서 지인들에게 "음악감상실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음악을 나누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다고 믿었다. 당시 대건고 독문과 교사인 송영택 시인이 하이마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감상실은 1957년 5월 13일 화전동 옛 대구극장 앞 건물 2층에 문을 열었다.
그는 헨델의 메시아와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무척 좋아했지만, 현재 그 음반은 하이마트에 없다. 그의 무덤 속에서 돌고 있다.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순희씨는 고교 입학 후부터 아버지의 엄명으로 주말마다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입고 하이마트로 출근해야 했다. 음반을 닦아 턴테이블에 올리고, 손님에게 차를 나르며, 칠판에 곡명을 쓰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1969년 대학 졸업 후 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받았지만 아버지가 하이마트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면서 음악감상실은 그의 천직이 됐다.
김수억씨가 음악인이었다면 어머니 박정삼(1994년 작고)씨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박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70년 벽면을 가득 채운 음악거장의 부조를 만들고, 에어컨을 도입했다. 지금도 음반실 한 구석에는 부부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다. 김씨는 "학창시절에 주말을 오롯이 하이마트에 바쳤기 때문에 여행 한 번 가 본 적이 없지만, 음악을 이웃과 나누라는 아버지 말씀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고 말했다.
하이마트는 1970, 80년대가 전성기였다. 많을 때는 하루 700명의 고객이 클래식음악을 듣겠다고 들이닥쳤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클래식에 빠진 장발의 청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83년 현재 자리로 이전할 즈음 음악감상실 문화가 내리막을 걸을 때도 나쁘지 않았다. 클래식에 목마르고, 모임 자리가 애매한 시민들에겐 좋은 만남의 공간이었다. 5,000장의 LP판과 CD, DVD, 진공관 앰프까지 갖춘 하이마트는 매력적이었다.
김순희씨는 자식(2남1녀)들이 하이마트를 이어가길 바라지 않는다. 취미로 음악을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다. 어릴 때부터 하이마트를 놀이터 삼아 성장한 장남 수원씨는 어머니 말을 거스를 수 없어 영남대 무역학과를 졸업했지만 몸속에 숨어 있던 음악 유전자는 그를 결국 2000년 프랑스 뤼옹국립고등음악원으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파이프오르간과 즉흥 연주, 작곡을 전공했고, 경북대 음악학과를 졸업한 아내 이경은씨는 프랑스 메츠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로 전공을 살렸다.
2006년 귀국한 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이마트로 정착했다. 김순희씨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조금씩 하이마트를 맡겼고, 지금은 오랜 고객을 맞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영자 입장에서 보는 음악감상실은 가혹했다. 코로나19 전에만 해도 '클래식 아카데미', '뮤즈', '피플', '다소리', '알흠회', '아날로그 감성피아노' 등 다양한 모임이 하이마트를 중심으로 결성돼 굴러갔지만, 지금은 대부분 끊겼다.
하이마트의 빈 곳간을 채우는 것은 박씨 몫이다. 연세대와 대구가톨릭대 출강하고,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범어대성당의 드망즈홀 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전남 목포의 가톨릭 성지인 산정동성당에 파이프오르간 설치 작업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음악감상실의 산역사다. "이 음악이 좋아요." "그래? 그렇다면 그 이유를 글로 한 번 써보렴." 초등학교 6학년 때 하이마트를 찾아온 대학생과 나눈 대화다. 어릴 적 이곳에서 뛰놀던 아이는 이제 감상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음악감상실 생존법은 '음악살롱'. 연주자와 청중이 1대 1로 만나 음악으로 소통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아무 변화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외조부와 어머니의 손때가 구석구석 묻은 하이마트를 경영상 이유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이마트를 밥벌이를 위한 공간이라고 하면 비참하겠지만 음악사랑방에서 가족이 가장 먼저 행복을 맛본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어요."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와 연대감을 느낀다고 한다. 음악을 선물처럼 이웃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빼닮은 탓이다. "저와 마찬가지로 하이마트를 놀이터 삼아 자란 자식 중 누구라도 음악을 좋아한다면 음악감상실을 이을 겁니다." 그 연대감과 공감대는 이제 4대로 확장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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