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호씨의 꿈은 현실이 된다

입력
2021.11.09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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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운 '윤광호'(에픽 5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1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어느 날 자녀의 커밍아웃을 받아 든 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34년 차 소방 공무원인 나비와 27년 차 항공승무원인 비비안은 각각 자녀로부터 “나 가슴 절제하고 싶어”라는 고백과 “엄마, 저 게이예요”라는 편지를 받는다. 자녀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들이 처한 ‘투쟁의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두 어머니는 자녀와 함께 무지개 깃발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갔고, 그렇게 투사가 됐다.

때로 어떤 삶은 세상의 맥락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평생을 존재 증명을 위한 투쟁에 사용해야만 한다. 거리로, 광장으로 나가 목소리 높여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투사가 되어야만 한다. 에픽 5호에 실린 김병운의 소설 ‘윤광호’의 주인공 윤광호씨 역시, 그의 짧은 생을 그렇게 사용했다.

광호씨는 2018년 4월 29일 만 3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인은 급성 폐렴이었고 2년 반 가까이 폐암 투병을 했다. 흡연 경험이 없는 광호씨가 폐암에 걸린 것은 의아한 일이었지만, 광호씨가 정작 자신의 병을 두고 억울해한 지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같은 죽음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에이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자살한 것도 아니니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못하는 그저 그런 죽음인 것 같다”는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 광호씨는 짧은 생 전체를 성소수자의 삶을 가시화하는 데 힘썼다. 게이 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며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세상의 차별과 혐오에 균열을 내기 위해 행동했다. 외출을 할 때는 시스루 치마를 입었고, 그런 자신의 옷차림을 어색해하거나 민망해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이 광호씨처럼 용감할 수 없다”는 대거리에도, 광호씨는 이렇게 답했다.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

김병운 작가. 다산북스 제공

시간의 힘을 믿었던 광호씨는 충분한 시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소설은 그런 광호씨의 시간을 대신 살고 있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바뀌게 될 미래를 광호씨 대신 목격하게 될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광호씨의 어머니는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고, 서점을 운영하는 광호 씨의 누나는 퀴어 섹션을 마련해둔다. 이혼 전문 변호사로 일하는 광호씨의 대학 친구는 동성 커플의 이혼 사건 수임이 목표고, 광호씨와 잠시 알았던 소설가 ‘나’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로 결심한다. 광호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리하여 결국 해피엔딩에 도달하고야 마는 우리를” 보여주겠다는 광호씨의 꿈을 이제는 남은 사람들이 대신 꾼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마이크를 든 비비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게이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 저도 매일매일 꾸고 싶습니다.” 꿈은 함께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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