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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제막… “동포 영령에 애도”

입력
2021.11.06 13:24
수정
2021.11.07 20:2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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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대사 등 참석... 건립 축하, 희생자 애도
건립위원장 “한일 우호·역사 전승 계기 되길”

6일 오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6일 오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유사 이래 전례 없는 죽음의 재앙이 이 땅을 덮치고, 우리 동포들의 목숨까지도 무자비하게 앗아갔습니다.
활짝 핀 무궁화를 보면서 고향과 가족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조국 광복을 간절히 염원해 왔던 동포들은 얼마나 가슴 떨렸으리오.
다시 고국 땅을 밟으리라는 뜻 끝내 이루지 못하고 표식 하나 없이 이국 땅에 한줌의 흙으로 남아 참으로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비는 원폭으로 인한 수난의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고, 희생당한 동포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치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증표입니다.
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나가사키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건립위원회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을 추진한 지 약 30년 만에 세워졌다. 가을비가 내리는 6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 평화공원에서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건립위원장으로서 건립을 주도한 강성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과 강창일 주일대사, 이희섭 주후쿠오카총영사, 나가사키시의회의 무카이야마 무네코 공명당 대표 등 내외빈이 줄을 당겨 위령비를 덮고 있던 흰 천을 걷자 높이 3m의 위령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6일 오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6일 오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전면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라고 적혀 있는 위령비의 기단은 거북 모양으로, 후면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 전면부 아래는 일제 시대 본인 의사에 반해 징용, 동원된 동포들이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 당시 수천~1만 명 희생됐다는 내용의 설명이 적힌 안내문이 있다. 참석자들은 위령비 제막 후 헌화와 묵념을 했고, 고교생평화대사 학생들이 평화의 상징인 종이학을 봉헌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9일 원폭 투하로 나가사키시에서만 약 7만4,000명이 사망했다. 이 중 수천~1만 명은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된다. 1979년 일본 시민단체가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했지만, 당시 민단의 요청에도 '한국'이란 문구를 넣지 못했다. 이후 1994년부터 민단 등이 중심이 돼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건립을 추진, 27년 후인 이제서야 완성됐다.

6일 오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강창일 주일 대사가 헌화 후 손을 모으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6일 오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강창일 주일 대사가 헌화 후 손을 모으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위령비 제막식에 이어 원폭자료관에서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강성춘 단장은 “이국 땅 나가사키에서 희생된 한국인 동포의 영령에 삼가 애도의 뜻을 바친다”며 약 30년에 걸친 한국인 위령비 건립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강창일 대사는 그동안 장소 문제, 우익 단체의 방해, 비문에 대한 나가사키시와의 이견 등으로 위령비 건립에 27년이나 걸린 사실을 염두에 둔 듯 “나가사키에서 아직까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없었던 것에 대해 일본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럼에도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일본인의 도움이 있었다”면서 나가사키 시의회의 무카이야마 무네코 공명당 대표 등을 거론하며 감사를 표했다.

강 대사는 “평화를 지키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며 “여러 어려움과 회의적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해 온 분들의 용기와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또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시는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며 “오늘의 작은 한걸음이 한일 간 모범적인 협력 사례로 남고, 나아가 세계 평화를 지키는 데에도 기여하는 큰 발걸음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6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에서 열린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강창일 주일 대사가 발언하고 있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6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에서 열린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강창일 주일 대사가 발언하고 있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이날 제막식과 위령제에는 위령비 건립을 도운 일본인 외빈도 참석했다. 나가사키 시의회와의 협의 과정에서 위령비 건립을 도운 무카이야마 공명당 대표는 “인류는 평화의 고귀함과 ‘전쟁의 비참함’을 차세대에 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히라노 노부토 평화지원센터 소장은 “나가사키 피폭자의 10%는 한국인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며 “앞으로 그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한국과 일본의 고등학생이 교류하는 사업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일본인 원폭 피해자 2세인 히라노 소장은 한국에 귀국해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도 일본에 있는 피해자처럼 일본 정부의 건강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고, 실제 이뤄내는 데 공헌했다.

나가사키=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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