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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나가사키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건립... 동포 염원 이뤄"

입력
2021.11.06 09:30
수정
2021.11.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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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韓 희생자 위령비 건설위원장, 기자회견
"우익단체 반대, 비문 문구 조율 문제로 오래 걸려"

6일 오전 제막식을 한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의 건설위원장을 맡아 건립을 주도해 온 강성춘(6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이 5일 일본 나가사키시 소재 사무실에서 한국 도쿄특파원 대상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6일 오전 제막식을 한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의 건설위원장을 맡아 건립을 주도해 온 강성춘(6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이 5일 일본 나가사키시 소재 사무실에서 한국 도쿄특파원 대상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2010년에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나가사키 폭심지(원폭 낙하 중심지) 공원을 방문했어요. 당시엔 일본 시민단체가 1979년에 세운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밖에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헌화하셨죠. 한편으론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를) 좀 더 빨리 만들어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컸습니다. 이제야 우리 손으로 염원이던 위령비를 만들어 한국인 피폭자들을 위로하게 됐으니 감개무량합니다.”

6일 오전 제막식을 한 일본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의 건설위원장을 맡아 건립을 주도해 온 강성춘(6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은 전날 나가사키시 소재 사무실에서 한국 언론사 도쿄특파원 대상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같이 말했다.

나가사키 지역 조선인 추도비는 일본 시민단체가 세워

나가사키시에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투하돼 약 7만4,000명이 사망했다. 당시 징용 등으로 한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나가사키에서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희생자 수도 수천~1만 명 정도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시민단체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당시의 조선인 기숙사나 숙소, 명부 등을 상세하게 조사해 계산해 낸 숫자로, 나가사키시가 공식 발간한 자료에도 명기돼 있다.

이 단체가 1979년 건립한 게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이다. 당시 민단 측은 ‘조선’과 함께 ‘한국’이란 말도 넣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원폭 투하) 당시에는 한국이란 나라가 없었고 모두 ‘조선인’으로 불렸다”는 이유 등으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다른 원폭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시에는 1970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현지 평화기념공원에 건립돼 매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날인 8월 5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리지만, 나가사키에는 한국인 위령비가 없어 추모 행사도 하지 못했다.

재일한국인 주도 '한인 위령비' 건설 노력에 약 30년

이에 재일한국인이 주도해 직접 한국인 위령비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1990년대 들어 일었다. 강 단장은 “민단 나가사키 본부가 1994년 5월 나가사키시에 장소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건립 움직임이 시작됐으나, 1994~1997년 평화공원 재정비 공사를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후 민단에서 여러 차례 위령비 건설 노력을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2011년 3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나가사키시에 건립 진정서를 내고, 이듬해 11월 주후쿠오카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평화공원에 위령비 건립 장소를 요청하면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다. 강 단장은 “나가사키시 담당 부서가 3개월에 한 번 있는 시의회에 참석해 의견을 듣고, 이후 비문 내용 등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으면 교섭 협의를 하는데 이 결과를 또다시 3개월 후 시의회에서 논의하다 보니 9년이나 걸렸다”고 밝혔다.

재특회 등 우익단체 반대, 문구 이견 등으로 오래 걸려

특히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후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같은 우익 단체가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혐한 시위를 벌이면서 2014년 나가사키에서도 위령비 제막 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 방해에 나섰다. 강 단장은 “당시 우익 시민단체의 반대 등으로 허가 과정이 까다로워졌고, 비석 높이도 원안(3.5m)보다 낮추라는 시 의견을 받아들여 3m로 낮아졌다”며 “다만 모양은 후쿠오카나 히로시마 등의 한국인 위령비와 비슷하게 기단을 거북이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디서든 한국인 위령비임을 알아볼 수 있게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비석에 새기는 문구도 문제가 됐다. 위령비에는 추도문과 함께 안내문이 새겨져 있는데, 원안에는 ‘강제적 동원’이라는 표현이 들어갔으나, 시의 반대로 “본인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으로 타협했다. 영문 비문의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2015년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당시 일본 정부가 “강제 노동이란 뜻이 아니다”라고 설명한 바 있어, 이를 토대로 시를 설득해 유지했다. 최종 확정된 안내문에는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본인 의사에 반해 노동자, 군인 및 군무원으로 징용, 동원되는 사례가 증가했다”며 한국인 원폭 희생자가 발생한 배경이 설명돼 있다.

매년 8월 8일 새 위령비 앞에서 추모 행사 개최 예정

강 단장은 나가사키시를 찾는 수많은 학생이나 관광객의 필수 코스인 ‘원폭 자료관’ 앞에 추모비가 세워지게 돼 앞으로 자료관을 방문하는 이들이 한국인의 원폭 피해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또한 앞으로 매년 원폭 투하 전날인 8월 8일, 새 위령비 앞에서 추모 행사를 개최할 생각이라며 “위령비가 한일 양국의 우호 증진과 한국인 피폭 역사를 후대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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