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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돈 많잖아” 비자 갑질에 남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교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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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는 이른바 '경계인'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들은 한국 대기업 혹은 중견기업이 직접 파견한 주재원이나 가족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베트남 당국의 허가를 받고 세금을 내며 자신의 현지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우도 아니다. 주로 큰 기업들의 하청 업무를 처리하는 소규모 기업 소속이거나, 베트남에 거주하는 교민들을 상대로 요식업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경계인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전까지는 늘 불안하게 산다. 소기업 근로자의 경우, 소속 회사의 명확한 현지 수익 창출 증빙이 부족해 대기업 주재원들처럼 노동비자(LD)를 손쉽게 받을 수 없다. 영세 서비스업 종사자들 역시 최소 30억 동(약 1억5000여만 원)에 달하는 자본금이 없기에 투자비자(DT)가 손에 닿지 않는다. 결국 남은 방법은 현지에서 규모가 큰 한국기업들과 계약 수주에 성공하거나, 교민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영업점이 자리 잡는 길뿐이다. 성과가 우선인 나라. 상대적으로 개방이 잘 진행됐다고 해도,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에게 여전히 배타적이다.
불확실의 영역에 있는 경계인들에겐 상용비자(DN)라는 선택지만 부여된다. 상용비자는 연단위로 발급ㆍ갱신되는 다른 비자들과 달리 1개월 단기(기간 중 1회 출입국 가능)부터 3개월 장기(복수 출입국 가능) 등 총 4개로 나뉜다. 적게라도 기회는 줄 테니, 베트남에서 최선을 다해 성과를 거둬 노동 혹은 투자비자 획득 조건을 충족하라는 취지다.
다행히 상용비자 연장 횟수는 제한이 없었다.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교류가 날로 확대됐고, 한국 관광객이 압도적 1위였던 중국인의 수를 넘기 직전일 정도로 양국 간 분위기가 좋았던 영향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큰 변수가 생겼다. 세계적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다.
상용비자 정책은 지난해 베트남이 '코로나19 방역 성공국'이라 불렸을 때만 해도 큰 변화가 없었다. 올해 초 노동법 등이 개정돼 발급ㆍ연장 요건이 다소 세분화되긴 했어도, 큰 틀에서 한국인에 대한 우호는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4월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베트남 경제가 크게 휘청거리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중앙정부의 강력한 봉쇄정책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현지 공장 운영이 멈췄고 현지인 실업자가 속출했다. 연이어 소비시장은 붕괴됐으며 자연히 소득세 등 각종 세수가 급감했다.
전염병이 확인시킨 경제 기초 체력의 부실. 베트남은 결국 자국민들의 재취업과 세수 확보를 위해 비자 정책의 방향을 전환했다. 그들의 첫 타깃은 상용비자 발급 인원이었다. 노동ㆍ투자비자 대상자들은 경제 외형 확대를 위해 계속 필요한 존재였으나, 세금 납부 없이 상용비자로 현지에 머무르는 경계인들은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인식했던 이유에서다. 실제로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기존에 큰 문제없이 연장되던 상용비자들이 거부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베트남은 상용비자 중계업체들이 만든 '페이퍼 컴퍼니'의 보증으로 현지에 머무르던 관행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동안 이 방식으로 장기 체류한 한국인들을 줄줄이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이 과정에서 합법적으로 상용비자를 취득ㆍ연장해온 한국인들의 불이익도 이어졌다. 특히 피해는 베트남 중앙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관공서 출근 인원을 절반으로 줄인 지난 7월 중순 이후 집중됐다. 멀쩡한 보증 회사로부터 서류를 완비해 상용비자 연장 서류를 제출해도 "업무를 처리할 공무원들이 출근을 못 해 행정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핑계와 함께 일괄 반송된 것이다.
사정이 급했던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1,000~2,000달러(약 117만~235만 원)의 비용을 현지인 브로커들에게 지불해 살길을 모색했다. 신기하게도, 뒷돈이 들어가자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 안 된다는 상용비자 연장 업무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응급책’을 쓰지 않은 한국인들은 관공서가 정상화된 지난달 중순 관련 서류를 재접수했다. 그러나 귀책 사유가 관에 있기에, 당연히 추가 처리될 것이라 믿었던 이들 앞으로 400만 동(약 20만 원)의 거주 기한 초과(오버 스테이) 벌금고지서가 날아왔다. 사실상 벌금을 내고 베트남을 떠나라는 통지의 의미였다.
벌금 납부를 요구받은 한국인들이 분노한 건 당연지사. 지난달 2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하노이 교민 A씨도 "그 정도 벌금이야 낼 수 있다"면서 "아직 도전이 끝나지 않았는데, 가만히 앉아 당하면 이런 일이 또 반복될 게 분명해 기록을 모두 들고 당국을 찾아가 항의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년째 상용비자를 연장해가며 겨우 사업 기반을 닦은 A씨는 지난 1일 벌금 부과 주체인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있는 호찌민행 비행기에 결국 몸을 실었다.
A씨가 완고한 베트남 당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가능성이 '제로(0)'에 가깝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이들은 A씨가 당국에 찍혀 불이익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최근 상용비자 오버 스테이 벌금 문제로 실랑이를 벌였던 교민 다수가 출국 과정에서 애를 먹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당국의 갑질을 당해 본 호찌민 교민 B씨 역시 "포기하는 게 빠르다"고 조언했다. A씨와 마찬가지로 오버 스테이 벌금이 부과된 B씨는 지난 8월 중순 귀국을 결심했다. 그러나 당국은 벌금을 내고 출국하겠다는 B씨를 불러 사유를 집중 조사한 데 이어, 최초 입국허가서와 출국 비행기표 예약증 등 추가 서류까지 요구했다. 그는 "5일 뒤 서류 제출과 벌금 납부가 완료됐는데도 담당자가 나를 앞에 두고 침묵만 지키더라"며 "그제서야 '아, 돈 달라는 소리구나' 싶어 500만 동(약 25만 원)을 찔러줬더니 출국비자(XC)가 바로 나왔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인들의 피해가 이어지자 주베트남 한국대사관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대사관 관계자는 2일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현장의 혼란을 감안하더라도, 오버 스테이 벌금 문제 및 출국비자 발급 불이익 사태는 명백히 비정상적인 행정"이라며 "관련 민원이 수집ㆍ파악되는 대로 베트남 공안과 외교부 등에 순차적으로 항의해 상황을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비자 발급 업무가 관계국의 내정 영역이라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교민들의 누적되는 민원을 해결하는 것은 재외공관의 의무다.
일선 현장에선 베트남 비자 관리 시스템의 전산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다. 종이에 도장을 찍는 현 행정체제가 유지되는 한, 지역별로 천차만별인 비자 발급 실무와 현장 공무원들의 '뒷돈 챙기기'는 근절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접근하는 현지인 비자 브로커들에 대한 규제 역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브로커들은 코로나19로 일거리가 줄자 과거 100달러 남짓하던 '수행비'를 최소 1,000달러까지 높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이에서 10년째 비자발급 중계사무소를 운영 중인 C씨는 "뒷돈을 자꾸 달라는 현지 공무원에게 '이건 너무 하지 않냐'고 항의해봐야 '한국인들은 이 정도 돈을 한 달이면 벌지 않느냐'고 심드렁한 반응만 보인다"며 "양국 우호를 고려하더라도,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정확히 힘을 주는 고국 정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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