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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11월2일 '울진에 30여 무장공비'... 토벌작전만 두 달

입력
2021.11.02 05:30
수정
2021.11.02 16: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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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2일
역대 최다 120명 침투… 113명 사살, 7명 생포
'반공 소년' 이승복 가족 등 희생자 20여 명 발생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1968년 11월 6일자 한국일보 1면. '울진에 30여 무장공비' 기사가 실렸다.

1968년 11월 6일자 한국일보 1면. '울진에 30여 무장공비' 기사가 실렸다.


1968년 11월 7일자 한국일보 7면. 무장공비 사살 소식과 주민 피해 소식을 다루고 있다.

1968년 11월 7일자 한국일보 7면. 무장공비 사살 소식과 주민 피해 소식을 다루고 있다.

1968년 11월 5일 대간첩대책본부는 약 30명 내외로 추산되는 무장공비가 11월 2일 밤 동해로부터 경북 울진군 북면에 불법침투,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여 군경과 향토예비군이 합동포위작전을 펴고 있다고 발표했다.

( 1968년 11월 6일 지면 보러가기 ☞ https://www.hankookilbo.com/paoin?SearchDate=19681106 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주소창에 URL을 넣으시면 됩니다.)

침투 인원은 역대 최다인 120명이었다. 무장공비 토벌 작전은 11월 2일부터 12월 28일까지 계속됐다. 이 가운데 113명이 사살됐고, 7명이 생포됐다. 우리 측은 군인, 경찰, 일반인 등 20여 명이 사망하는 희생이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1968년 12월 9일, 당시 9세였던 이승복 군과 가족도 포함됐다. 이후 이승복 군은 ‘반공 소년’을 상징하며, 1990년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반공교육 내용으로 소개됐다.

1968년 11월 23일 3백여 내외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우선 '서울의 야경에 놀랐다'면서 반연설조로 유창하게 대답하는 생포공비 정동춘과 고등운(앞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8년 11월 23일 3백여 내외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우선 '서울의 야경에 놀랐다'면서 반연설조로 유창하게 대답하는 생포공비 정동춘과 고등운(앞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8년 12월 23일 자수한 무장공비 김익풍(맨 오른쪽)과 생포된 김광춘, 김정명, 이정수 4명이 1968년 12월 23일 오전 9시 중앙정보부에서 약 1시간동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8년 12월 23일 자수한 무장공비 김익풍(맨 오른쪽)과 생포된 김광춘, 김정명, 이정수 4명이 1968년 12월 23일 오전 9시 중앙정보부에서 약 1시간동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아래 주소로 들어가시면 1954년 6월 9일 창간호부터 오늘까지 2만3,000여 호의 한국일보 신문 PDF를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 https://www.hankookilbo.com/pao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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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hkphoto.hankookilbo.com/photosales )


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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