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1> 레고랜드 건설중인 춘천 중도 유적
유적이 화장(化粧)을 할 때
고고학자들이 발굴작업을 할 때는 힘들고 현장이 어수선하지만 마무리되는 시점에 보여지는 유적의 모습은 그야말로 ‘매직’이다. 사람들은 고고학자들이 펼치는 ‘대지미술’의 극적인 장면에 황홀함을 느낀다.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마치고 드러난 유적의 구조를 사진으로 기록해야 하는데, 혹시 유적의 세밀한 모습이 사진상으로 잘 보이지 않을까봐 마지막 순간에 유적에 화장을 한다. 모든 발굴면을 깨끗하게 면도하듯이 깎고 구조물의 윤곽선, 예를 들어 주거지선의 모서리에 하얀 선을 입히고 중요한 유물이 드러난 지점은 이쁜 상징물을 박아서 사진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
내가 평생 보았던 고고학발굴의 '파이널 신'(final scene) 중에서 가장 뇌리를 떠나지 않는 유적은 바로 춘천 중도의 ‘고대도시유적’이다. 나무와 짚으로 구성되었을 지상 구조는 사라져 없지만 움집이 있던 구덩이들과 고인돌의 큼직한 뚜껑돌, 모래땅에서 드러난 석관묘들이 시야 끝까지 펼쳐진 광경은 고고학자로서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레고랜드 공사현장에서 느끼는 고고학자의 비애감
옛날에는 춘천역 뒤에 있었던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넜는데 이제는 멋진 다리가 하중도로 연결되어 있다. 지난 10여 년간 문화계를 시끄럽게 했던 중도는 상중도와 하중도로 구분되는데 현재 두 섬은 작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의암댐이 건설된 이후 육지와 분리된 섬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갈수기 때 걸어서도 건널 수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춘천의 고고학자인 K선생의 안내를 받아 자동차를 타고 들어간 하중도는 현재 레고랜드 공사가 한창이어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유적을 발굴한 다음 흙으로 덮은 상태라 볼 수가 없으니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레고랜드 중심에 공사 중인 높다란 빨간 구조물을 쳐다보며 둘러쳐진 담장을 따라 한 바퀴 삥 도는 수밖에 없었다. 정비되어 보존된 적석총에도 들어가지 못해 바깥에서 시선을 던지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담의 안쪽에는 유적을 어지럽게 덮은 모래밭이 온통 펼쳐져 있었다. 발굴을 마감할 때의 그 감동적인 현장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머지않은 미래에 모습을 드러낼 레고랜드를 상상하니 고고학자로서 무기력함에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은 고고학자들에게는 아이를 낳는 일과 같다. 아마도 이 유적을 발굴한 동료 고고학자들의 마음에 발견의 희열과 유적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아쉬움이 뒤엉켜있으리라 생각하니 고고학 여행자의 마음도 한없이 무겁다.
요녕식동검, 중도 청동기시대를 말하다.
춘천의 중도유적. 1970년대에 발견되어 1980년대 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고인돌과 적석총이 발굴된 것이 최초의 고고학 조사였다. 당시 아직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온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한국 최초로 나타난 것들이 많았다. 유물이나 유구에 ‘중도식 토기’ 또는 ‘중도식 주거지’ 등의 수식어가 붙었고 아직도 원삼국시대 문화를 설명할 때 사용될 정도로 획기적인 유적이었다.
해마다 홍수가 나면 중도의 호안(湖岸)이 무너지면서 모래층 속에서 유물이 나뒹구는 모습이 관찰됐고 모래층에 검은빛의 주거지 선들이 드러나면서 ‘아하! 엄청난 유적이 잠자고 있구나!’라는 예측은 되었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많은 주거지들과 무덤들이 끝없이 이어진 모습이 드러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중도유적에서 드러난 유구들이 물론 모두 동일한 시대에 속하는 것은 아니고 신석기부터 삼국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흔히 '마을 유적'이라고 부르는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크기의, 사서에 나오는 읍락(邑落)이라고 불릴 만한 취락 유적이 레고랜드 건립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석관묘 무덤에서 요녕식동검이 부러진 채 발견된 것은 이 유적의 정체와 당시 사회구조와 관련해 학자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발굴자들은 이 동검이 발견된 작은 주거지를 당시 제사장의 집으로 보고 있다. 특히 주거지에서 발견된 동검이 랴오닝(遼寧·요녕)성의 선양(瀋陽)지역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상 비슷하여 고조선문화 흐름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도시의 기원을 생각하게 하는 중도
중도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흔적이 발견됐다. 3,000곳이 넘는 집자리와 분묘가 나와 우리나라 발굴사를 새로이 쓴 최대의 유적이다. 원삼국시대의 온돌 시설과 입구가 별도로 달린 중도식 주거지, 고구려문화의 흔적이 보이는 삼국시대 고분도 포함되어 있고 3,500년 전쯤 시작되는 청동기시대의 크고 작은 집자리는 1,300기나 된다. 그런데 청동기시대 주거지들이 흔히 구릉지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달리 중도 유적에선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충적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시대 집자리에는 사람이 쉽게 넘을 수 없게 하는 구덩이인 환호(環濠)에 둘러싸인 곳이 있다. 이 네모꼴의 환호는 지형의 꼭지를 원으로 둘러싼 환호와는 다른 개념이다. 내부의 집자리들도 어느 정도 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미뤄보아 계획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 내부에는 입구광장으로 보이는 공간도 있고 기능이 다른 집자리들도 있으며 환호의 바깥에도 집자리들이 있다. 그리고 분묘들도 일정한 장소에 무리지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도시 내에서 공간의 기능적인 구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집 크기의 차이가 크고 분묘의 구성이 다양한 것 역시 당시 사회가 복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은 집자리들을 시대별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집단들이 일정한 질서 속에서 살아갔던 도시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대규모의 집자리들이 엄청나게 큰 환호로 둘러싸인 도시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흔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대 춘천시민, 중도인
그러나 청동기시대 후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에 살았을까?’라는 문제에는 간단하게 답하기 어렵다. 다만 아프리카 유목민의 집이나 몽골 게르 한 동(棟)에 삼대(三代)가 함께 살고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 이전에는 한 사람이 한 평(坪) 정도의 공간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시 상당한 규모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람 품이 많이 드는 고인돌 무덤이나 쌀농사의 흔적에서도 미루어 짐작되는 일이다. 또 다른 질문인 ‘어디서 왔을까?’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유적에서 부분적으로 인골이 발견되었지만 청동기시대 주민집단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지역으로 흐르는 두 개의 강이 동쪽의 산맥에서 온다는 점은 영동 지역의 주민이 넘어왔으리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토기에서도 돌대문(突帶紋)토기나 공열문(孔列紋)토기들의 분포가 한반도 동북지방과 연속된다는 점에서 역사시대의 주로 동쪽지방에 살았던 예(濊)족의 조상들이 흘러와 섞였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소위 맥(貊)족 계통으로 보는 고구려나 백제, 낙랑의 유물의 존재에서 보듯이 한강하류나 그 이북지역과의 교류가 많았을 것이기 때문에 두 방향에서 오는 집단들이 어느 정도 섞였을 것이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석관묘나 고인돌의 조영에서 강돌로 부석(敷石)을 깔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방식은 다른 지방에서는 드물게 나타나고 있어서 이 지역만의 특성이라고 한다.
그러한 점들은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융합되어 고유한 문화를 가진 ‘고대 춘천시민’이 된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시대 초기에 대단히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외래계 문화의 존재가 이러한 상상으로 연결된다. 엄청난 발굴이었지만, 앞으로 수많은 고고학적인 질문들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향후 인접한 우두동이나 천전리 등의 유적들이 더 조사되고 함께 연구되면 중도의 청동기시대 문화가 더욱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강이 쉬어가는 곳, 중도
금강산에서 흘러오는 북한강과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소양강, 이 두 큰 강의 합수지점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섬이 물머리 쪽에 있는 상중도이다. 물길이 춘천분지에 들어설 때 상중도에 부딪혀 감싸고 돌면서 유속이 떨어지고 물줄기가 갈라지면서 그 아래쪽에 만든 섬이 하중도다. 소양강처녀 동상이 서 있는 곳에서 아름다운 춘천호수 위에 떠있는 상, 하중도의 모습은 마치 평화롭게 물속에 잠긴 하마의 등짝 같다. 그러나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건너편 높은 언덕에 올라 내려다본 하중도의 누렇게 헐벗은 모습은 고고학자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선배고고학자 L교수의 한탄, ‘왜, 우리는 이렇게도 중요한 유적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는가!’라는 말씀이 귓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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