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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정신건강'이 공적 영역? 미국서 뜨거웠던 '트럼프 정신 건강'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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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전 제주지사의 부인인 강윤형씨가 정신과 전문의로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겨냥해 "소시오패스" "안티소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의료윤리 위반' 논란이 불거졌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직접 검진 없이 추정을 사실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있는 반면 원 전 지사 쪽은 "대통령의 정신 건강은 공적 영역"이라며 "미국에서도 많은 의견 표출이 있다"고 반박했다.
실제 미국에서도 이와 거의 흡사한 논쟁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문이다. 대선후보 기간부터 제기된 '정신 감정' 논란은 2017년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 등 27명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신 건강에 대한 의혹은 임기 말 그에 대한 탄핵 움직임에도 논거를 제공했다.
또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경쟁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대선 판세를 뒤집으려 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실제 선거 결과나 두 대통령의 집권 자체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미국 정신의학과협회(APA)는 1973년 '골드워터 규칙'을 제정했다. 이 규칙은 구체적이고 공식적으로 정신 감정을 하지 않고 함부로 개인의 정신 상태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규정이 제정된 계기는 1964년 대선이다. 1964년 대선 당시 잡지 '팩트(Fact)'가 정신과 의사 1만2,356명에게 "배리 골드워터(당시 공화당 후보)가 심리적으로 미국 대통령으로 봉사하기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2,417명이 응답했고 그중 1,189명은 "적합하지 않다"는 응답을 냈다. 내용을 보면 "과대망상" "편집증" "마오쩌둥, 히틀러, 카스트로, 스탈린 같은 정신분열병 지도자와 같은 증상" 등의 묘사가 들어 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었다. 토머스 스타크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정신의학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자 개인적 모욕"이라면서 '팩트'와 설문에 응한 의사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조지프 샤크터는 "개인적으로 골드워터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만 정신적 진단을 근거로 그가 대통령에 부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샤크터는 훗날 "정신과 의사가 선거와 후보자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자유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APA의 대니얼 블레인 당시 회장은 '팩트'의 조사가 "과학적 또는 의학적 타당성이 전혀 없다"며 "의사 개인의 정치적 견해 묶음"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팩트'의 조사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골드워터는 대선에서 린든 존슨 민주당 후보에게 완패했고 '팩트' 편집진에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 7만5,000달러를 받았다.
현재 '골드워터 규칙'을 지지하는 이들은 정신과 의사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정치인을 포함한 공적 존재에 대해 직접 검진 없이 정신의학적 진단을 진행할 경우 환자가 정신의학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가 공무를 담당하기에 "무가치하다"거나 "부적합하다"라는 표현과 연결되는데, 이는 해당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APA는 2016년 대선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트럼프를 겨냥해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는 청원이 제기되자 "일부 회원들은 대선 후보의 정신상태를 분석하고 싶어할 텐데 그렇게 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악관의 내부 사정을 알리는 취재를 통해 그의 변덕스러운 통치 행위가 알려지자 골드워터 규칙도 위기를 맞았다.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로 재직한 밴디 리를 비롯한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및 치료사 27명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라는 책을 펴내면서 "트럼프의 정신건강이 미국인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국가에 심대한 위기를 초래하고 전쟁에 빠지게 하거나 민주주의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골드워터 규칙이 도입된 50여 년 전처럼, 결국 이 논쟁도 법정으로 갔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의 출판을 주도한 밴디 리 박사는 2020년 예일대 교수직에서 해임된 후 현재 법정 분쟁을 진행하고 있다. 친트럼프 성향 변호사 앨런 더쇼위츠를 겨냥해 "트럼프의 증상을 전염당했을 수 있다"고 적은 트윗이 화근이 됐다. 더쇼위츠는 예일대에 리에 대한 공개 징계를 요구했고, 존 크리스털 당시 예일대 정신의학과 학장은 "APA의 골드워터 규칙을 수시로 위반했고 경고의 의무를 진료에서 국가정치의 영역으로 부적절하게 끌어올렸다"고 해고 이유를 댔다.
이에 리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APA가 윤리적 가이드라인에 불과한 골드워터 규칙을 정치적으로 압박해서 학자들의 발언을 억압하는 수단(gag rule)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또 골드워터 규칙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들은 트럼프의 통치에 대해 미국인들에게 "경고할 수 있고, 경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통치로 인한 명백한 해악이 눈에 보이는데도 침묵하는 것은 정신질환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주변인에 대한 '경고 의무'를 어긴 것이라는 얘기다.
리는 APA가 '골드워터 규칙'을 "법률이 아닌데도 법률처럼 적용하고 있다"며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를 규정한)와 상충하므로, 이는 틀림없이 법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또 APA가 아닌 다른 정신 건강 관련 협회에는 이 지침이 없으며, APA는 비회원를 대상으로 어떠한 제재를 내릴 권위도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 APA와는 다른 조직인 미국정신분석가협회(APsaA)나 미국심리학협회 같은 단체에는 '골드워터 규칙'에 상응하는 규정은 없다. 또 APA 자체도 골드워터 규칙을 위반했다고 해서 해당 회원을 제명하거나 제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논평을 내놓는 수준에서 그친다. 규칙 자체가 APA 내부에서도 선언적 의미에 가깝게 여겨진다는 의미다.
또 밴디 리 박사뿐만 아니라 골드워터 규칙을 옹호하는 APA 회원들도 트럼프의 정신 건강에 대한 논평을 한 적이 있다. 앨런 프랜시스 듀크대 교수는 "트럼프는 자기애주의자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윈스턴 처칠, 에이브러햄 링컨 등도 정신 질환이 있었지만 위대한 정치인으로 통한다"며 정신질환이 대통령 직무에 결격사유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반트럼프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가 설립해 이끌고 있는 '세계정신건강연합(WMHC)'이란 단체는 트럼프의 정신건강을 이유로 그의 탄핵과 직무 박탈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WMHC는 2019년 트럼프 대통령 탄핵안이 최초로 하원에서 논의되자 트럼프의 정신 건강을 우려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제출했다. 2021년 1월 미국 국회의사당이 대선 결과를 무효화하려는 트럼프 지지자 군중의 습격을 받자, 대통령 직무를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이들이 근거로 제시한 것은 수정헌법 25조의 한 조항이다.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상태'에는 대통령 본인의 동의 없이도 직무를 대행하도록 할 수 있다는 조항인데, 트럼프는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이 조항을 발동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골드워터 규칙 논쟁에서 APA 쪽을 대변해 온 제프리 리버먼 컬럼비아대 의료센터 정신과장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정신과 의사의 전문성이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철저히 헌법적 절차에 따라서 정부가 요청할 때에만 의견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못하고 평시 대통령의 정신 상태를 평가하는 것은 정신의학의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리버먼은 "정신의학이 과거 애국심을 이유로 반체제 인사나 시민 저항 운동을 탄압하는 데 동원된 사례가 수없이 많다"며 "정신의학은 유죄를 입증하기 위한 표준 절차를 우회하기 위해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의료 전문 분야보다 더 남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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