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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독일제빵서 맞선 보고 미팅하셨던 분들, 잘 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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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 아쉽기만 한 10월 마지막 주 월요일 아침. 제법 쌀쌀해진 아침 날씨에 출근길을 재촉할 시간이지만, 고소한 냄새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갓 구운 빵 한 조각 생각이 절로 난다. 발길이 머문 곳은 강원 춘천시 중앙로 독일제빵. 54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빵집이다.
130㎡(약 39평) 남짓한 제과점엔 소보루와 단팥빵, 초코머핀, 땅콩 쿠키, 전병, 옥수수식빵까지 먹음직한 빵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바케트와 크라상, 도넛 등으로 가득한 요즘 프랜차이즈 빵집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큼직한 롤 케이크에 궁서체 글씨와 장식이 더 잘 어울리는 둥근 케이크, 멋 부리지 않은 소박한 비닐 포장지까지, 오래전 추억 속 빵집 모습 그대로다. 화려하지 않아 되레 정이 가는 모습이랄까.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거치며 중앙로 주변 은행의 간판이 수차례 바뀌었고, 거북당과 뉴욕제과, 피카디리 극장(소양극장) 등 지역에서 이름난 제과점과 극장이 문을 닫았지만, 독일제빵은 꿋꿋히 이 자리를 지켰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춘천시민들에게 '맛있는 추억'을 실어나르고 있다. 시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지금의 독일제빵을 지키고 있는 대표 장명희(61)씨는 "분위기도 맛도, 마음가짐도 처음 문을 연 53년 전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다.
춘천시내 제과점 가운데 '터줏대감'격인 독일제빵은 1968년 고(故) 현영수(1935~1999)씨가 창업했다. 서울의 유명 제과점에서도 손꼽히는 기술자였던 그는 블란서와 이태리, 런던, 파리, 로마 등 유럽 지역의 국가와 도시 이름을 따라하던 유행에 맞춰 '독일제빵'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먹을거리가 많지 않고 해외여행도 쉽지 않던 시절, 빵맛이라도 유럽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만들어 내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장씨가 기억하는 시아버지는 그야말로 '빵의 명인'이었다. 그는 "손재주가 남달라 못 만드는 빵과 과자가 없었죠. 같은 재료라도 시아버지 손을 거치면 깊은 맛이 달랐다"며 "요새 말로 '우리 집 빵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제빵에서 구운 빵은 '깊은 맛이 있다'는 평가를 꾸준히 받았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주민 박기훈(55)씨는 "독일제빵에서 만든 쿠키와 화과자는 아이들이, 전병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메뉴였다"며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등 특별한 날이 되면 주황색 박스로 포장한 독일제빵 케이크를 들고 발길을 재촉하던 사람들도 기억난다"고 독일제빵과 관련된 추억을 떠올렸다.
장씨 기억처럼 창업주인 현씨는 1970년대 춘천시내에서 가장 먼저 수제 햄버거를 선보일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 당시로선 이름도 생소했을 마카롱을 처음 내놓은 제과점도 독일제빵이었다. 약혼식이나 회갑, 회사 창립기념일에 선보일 화려한 3, 4층 케이크도 뚝딱 만들어냈다는 장씨의 기억이다. 빵의 명인이란 찬사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명인이 남긴 레시피와 열정이 있었기에 수십 년 전 코흘리개 꼬마가 지금은 중년의 신사가 돼, 다시 찾는 업소가 됐다"는 중년의 단골 손님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현씨는 직원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데도 공을 들였다고 한다. 장씨는 "시아버지의 제과기술을 익힌 직원들 중에서는 자신의 가게를 차린 분들도 꽤 된다"고 말했다.
춘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중년들에게 독일제빵은 서울 태극당과 부산 뉴욕제과, 대전 성심당 못지않은 추억의 장소다. 평생의 배필을 만날지 모르는 맞선과 데이트 장소로 꽤나 유명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분위기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많지 않았다"며 "우리 가게가 시내 중심가에 자리해서인지 맞선을 보는 청춘들이 꽤 많았다. 그때 그분들, 진짜 결혼 반지를 끼었는지 궁금할 때도 있다"고 웃어 보였다.
그 시절 주말 독일제빵은 고교생들로 넘쳐났다. 주5일제가 보편화된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몰려와 허기진 배를 채웠다. 학교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잠시나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곳도 독일제빵이었다. 덤으로 얹어주는 빵에 담긴 주인장의 마음까지 더해져, 제과점은 요즘 말로 고교생들의 '핫 플레이스'였다. 장씨는 "그 시절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 입은 남녀 고교생들이 둥글고 큰 '맘모스빵'을 시켜 놓고 미팅을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미소를 지었다. 빵 접시와 포크를 사이에 두고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10여 명이 수줍게 마주보던 추억의 한 장면이다.
춘천에서 고교를 졸업한 주민 최상준(57)씨는 "세월이 흘러 한 번쯤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때를 간직한 공간이 독일제빵"이라며 "당시 테이블을 붙이고 10명이 넘게 미팅을 하며 모여 앉았지만, 서로 눈치만 보느라 빵을 많이 먹지도 못해 빵집 매출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춘천에 캠퍼스가 있던 성심여대생들도 장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손님들이다. "얼마 전 외국에서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는 분이 여대생 시절 맛을 잊지 못해 우리 가게를 찾았다"며 "이렇게 찾아주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굳건히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제빵은 김희애 하희라 주연의 MBC 드라마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1990)와 청소년 드라마 '사춘기'(1993) 등 1990년대 초반 춘천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단골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제법 긴 세월을 지나다 보니 빵집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빵집이 급속히 늘어난 1990년대 이후 독일제빵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햄버거와 피자 전문점까지 곳곳에 등장하고, 사람들의 식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매출이 급격히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곽 택지개발로 춘천 중앙로의 유동인구마저 눈에 띄게 감소했다. 한때 10명이나 됐던 직원들도 점점 떠나고, 매장 내 테이블 숫자도 줄였다. 장씨는 "중앙로의 경우 퇴근 시간이 지나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라며 "이런 이유로 시내에 80개가 넘었던 제과점들이 줄지어 문을 닫고 지금은 20여 개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던 장씨도 이 대목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씨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11년 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종류의 빵을 개발했다. 시아버지가 물려준 기술과 장인장신에 자신의 레시피를 더한 수제 호두파이가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온라인과 택배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제 호두파이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의 '빵지 순례객' 사이에선 제법 알려진 메뉴가 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달콤하면서도 건강한 맛이 일품'이라는 취지의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춘천을 대표하는 맛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장씨가 밝힌 수제파이 레시피는 복잡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겉부분인 파이지(파이의 바깥 부분, 피자의 도우에 해당)를 만들고 버터와 계란, 메이플시럽 등을 잘 배합한 '필링'을 채운다. 그 위에 호두를 뜸뿍 넣어 구우면 동그랗고 먹음직스러운 파이가 된다. 화학첨가물 등을 전혀 넣지 않고, 재료의 조화만으로 건강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호두파이를 먹는 방법도 독특하다. 장씨는 "셔벗 같은 파이지에 부드러운 필링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파이를 얼려 먹으면 맛이 더 좋다"며 "냉동하더라도 파이지와 호두가 딱딱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냉동하면 두 달까지 보관할 수 있어 두고두고 파이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게 그의 얘기다.
장씨는 "쇠퇴한 옛 도심이 활력을 되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매출을 더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건강한 맛을 선물하고픈 빵 장인의 작은 소망이다. 얼마 전 속초 중앙시장에 들렀다는 장씨는 "먹거리 타운이 관광객을 유치하고 나아가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며 "춘천 도심도 효과적인 정책이 나와 활력이 넘쳤으면 좋겠다"고 작은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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