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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 믿어주세요' 노태우, 5공과 차별화... 북방외교는 평가

입력
2021.10.26 16:20
수정
2021.10.26 16:2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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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태우' 비판에도 관대... 김종인 등 전문가 영입
탈냉전 맞물려 공산국가와 수교·남북관계 주도
전교조 불법화·범죄와의 전쟁 등 공안통치 흔적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임에도 5공화국 탄생에 개입한 이력에 독재정권의 연장으로 인식됐다. 언론 자유화 등 '권위주의 질서' 타파 등은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무르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물태우'라는 별명과 달리 당시 냉전 해체와 맞물려 외교와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북방정책을 통한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남북 유엔(UN) 공동 가입, 비핵화 선언 등을 주도한 것은 대표적 업적이다. 다만 재임 시절 불법 비자금 조성, 전교조 불법화 정책, 범죄와의 전쟁 선포 등은 부정적 평가를 받는 요인들이다.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로 5공 흔적 지우기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왼쪽) 대표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왼쪽) 대표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 전 대통령은 군부 독재에서 민주화로의 전환기에 집권해 문민정권으로의 가교역할을 수행했다.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잇는 후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으나, 이를 의식해 '5공 청산'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1987년 대선후보 시절 대중 유세에서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외쳤고, 1988년 취임사에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강조한 것은 그래서다. 전임 대통령들이 '본인' '나' 등의 호칭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저'라는 호칭으로 낮췄다.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는 대신 김종인 경제수석 등 민간 전문가를 적극 영입했다.

특히 언론자유화를 주도해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시절'의 언론통폐합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이에 신생 언론사들이 다수 생겨났고 국민들이 '물태우'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단 이러한 정치·사회·언론 전반의 민주화 분위기가 노태우 정부의 업적이기보다는 '시대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공산권과 수교·남북 유엔 동시 가입 이끌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1991년 4월 제주 호텔신라에서 가진 환영만찬에서 인사말을 하며 웃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1991년 4월 제주 호텔신라에서 가진 환영만찬에서 인사말을 하며 웃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에 비해 유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평균 경제성장률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8.4%, 실업률은 역대 최저인 2.3%를 기록하며 내실을 탄탄히 다졌다. 대외적으로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으로 한국 외교를 국제무대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북한의 무력도발이 거의 없었던 정권이기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보다 남북관계가 좋았다는 견해가 나올 정도로 대북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 전 '7·7 선언'을 통해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북한이 미국·일본 등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에도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념지향적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실리를 중시하면서 그간 팽팽했던 남북 외교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등 40여개 국과 수교를 맺었다. 일부에서 '외교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5일 러시아 크렘린궁 기오르기예프스키홀에서 열린 공식환송식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5일 러시아 크렘린궁 기오르기예프스키홀에서 열린 공식환송식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로 북한의 고립된 상황을 적극 활용했다. 다급해진 북한과 1990년 9월 남북 고위급회담에 이어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어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년 9월 17일)과 비핵화 선언(1991년 11월 13일) 등도 노태우 정부의 굵직한 성과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북한을 유엔 무대로 이끌어 냄으로써 한반도 문제가 남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유엔 회원국들의 공동 책임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4,000억대 비자금으로 '부패 꼬리표'

1996년에 12·12사태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6년에 12·12사태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임 중 축적한 4,000억 원대 비자금은 이러한 성과들을 뒤덮을 정도로 큰 과오였다. 권력을 이용해 대기업 총수들로부터 지속적으로 거액을 받아 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기억 속에 '부패 정권'으로 남게 됐다.

또한 1989년 5월 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 결성에 참여한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파면한 조치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요인이다. 이에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경찰사복체포조(백골단) 구타로 사망하면서 대학가의 반정부 시위는 격화됐고, 대학생 분신이 잇따랐다.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권위주의 공안 통치가 부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범죄율을 낮춘다는 목표하에 불법 연행, 총기 사용의 남용, 무리한 수배자 검거 등 독재정권에서 있을 법한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한 것도 오점이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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