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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없으니 말하지 말라" 값싼 노동력의 낙인 '0번증'

입력
2021.10.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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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경 고산지대 넘은 소수민족들
'0번증' 발급받고 저임금 단순직 종사
'미얀마인' 멸칭으로 불리며 이동도 제한
55만명 거주 집계… "2배 이상 많을 것"

편집자주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들, 무국적자다. 전 세계 무국적자는 300만 명, 그중 3분의 1은 아이들로 추산된다. 무국적 문제는 보편 인권에 바탕해야 할 인간사회의 심각한 허점이자 명백한 인재(人災)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다.


미얀마 출신 무국적자 문제는 로힝야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국 국경 인근 카렌주에 모여 살던 카렌족 또한 군부의 폭압을 피해 태국 북부 국경의 고산지대로 대거 탈출한 이후 무국적자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샨주에 거주하던 따이 루족 등도 같은 처지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와 미얀마 독립 이후 계속된 정치 불안은 힘없는 소수민족의 삶부터 무너뜨렸고, 누구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이들의 무국적자 신분은 70년 넘게 대물림되고 있다.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얀마인' 차별에 상처"

선대가 미얀마의 샨주에서 이주한 후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을 못해 무국적자로 살아온 남쭘 싸이씨가 7일 본보와 화상인터뷰에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얘기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 제공

선대가 미얀마의 샨주에서 이주한 후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을 못해 무국적자로 살아온 남쭘 싸이씨가 7일 본보와 화상인터뷰에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얘기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 제공

수십 년 전 선대가 미얀마 내전을 피해 샨주에서 이주, 태국 치앙라이도 메짠군에 살고 있는 루족 출신 남쭘 싸이(24)씨 가족에게도 무국적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싸이씨 3형제는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형제 모두 무국적자가 됐다. 태국어가 서툰 데다 제대로 된 길도 없는 고산지대에 흩어져 살던 이들은 출생신고가 뭔지도 몰랐다.

싸이씨는 7일(현지시간) 유엔난민기구(UNHCR)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화상인터뷰에서 "집과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고, 매년 임대료를 받아갔던 주인이 언제 마음을 바꿔 쫓아낼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회상했다. 소유는 물론 이동의 자유도 없었다. 그는 "거의 집에만 있어야 했다"며 "다른 도시에 가려면 허가증을 받아야 했고 7일 이상 머물 수 없었다"고 했다.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을 못해 무국적자로 살아온 남쭘 싸이씨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치앙라이도 메짠군에서 가족과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Ms. Aunthip Puttawong)

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을 못해 무국적자로 살아온 남쭘 싸이씨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치앙라이도 메짠군에서 가족과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Ms. Aunthip Puttawong)

성장 이후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무국적자는 당장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정부가 지정한 업종의 일자리만 얻을 수 있는데 대부분 건설노동자, 농부, 베이비시터와 같은 저임금 단순노동이다. 고용이 되더라도 태국인의 절반 수준으로 급여를 받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기 일쑤다. 부모님과 파인애플을 키워 파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싸이씨는 "형이 취직을 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국적자에 '0번증' 발급, 3D 노동력 충당

미얀마군부의 공습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하는 카렌 주민들. 미얀마나우 캡처

미얀마군부의 공습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하는 카렌 주민들. 미얀마나우 캡처

UNHCR에 따르면 태국 정부는 지난달 기준 싸이씨 가족과 같은 무국적자를 55만3,969명으로 집계했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들은 제외한 수치인데, 미얀마 출신 카렌족 등 국경 지역 난민캠프 9곳에서 생활하는 9만1,479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지 전문가들은 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이들까지 따지면 무국적자 수가 공식 통계보다 최소 2배 이상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국에 있는 미얀마 출신 무국적자의 처지는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족보다는 낫다. 태국 정부가 무국적자 등록을 할 경우 최소한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렇다고 일상적 차별과 멸시까지 피하긴 어렵다. 싸이씨는 "학교에서 국적이 없는 아이들은 '미얀마 사람'이라고 놀림받아야 했다"며 "마을 회의에서도 '당신은 태국인도 아닌데 왜 말을 하느냐, 국적이 없으니 의견을 낼 필요가 없다'고 괄시했다"고 말했다.

태국은 이른바 '0번증'을 발행해 무국적자를 관리한다. 0번증이란 태국 국민과 달리 '0'으로 시작하는 13자리 숫자가 적힌 ID카드(신분증)인데, 이를 발급받은 무국적자는 10년 거주가 보장된다. 대신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고 사실상 저임금 노동을 강요받는다.

현지 전문가들은 태국의 무국적자 등록제도는 '값싼 노동력 공급'을 위한 관리 정책이라고 꼬집는다. 체제 불안을 야기하는 소수민족을 내쫓으려는 미얀마 정권과 경제 성장을 위해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려는 태국 정부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태국 무국적자 관련 연구를 해온 한유석 전북대 무형유산정보연구소 박사는 "태국 정부는 노동력이 필요할 땐 국적 조회로 0번증을 발급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단속해 추방하길 반복한다"며 "무국적자 정책은 경제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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