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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땐 노동자, 책임질 땐 사장... 방문점검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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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란 이름의 乙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 불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 프랜차이즈 점주 등 갑질에 시달리는 ‘을(乙)’ 개인사업자의 현실을 그들의 관점(view)에서 풀어냅니다
30년 된 다세대주택, 한 중년여성이 바윗덩어리만 한 배낭을 둘러멘 채 5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간다. 밭은 숨을 눌러 삼키며 초인종을 누른다. “고객님, 엘지 케어솔루션에서 나왔습니다~” 대답은 없고 개 짖는 소리만 공허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 어쩌다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여는 남성 고객 앞에선 ‘요령껏’ 시선을 돌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LG 렌털 가전 점검원 신현정(49)씨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QR코드’는 그의 하루를 졸졸 따라다니며 동선을 기록한다. 고객 소유 기기에 붙은 OR코드를 휴대폰으로 스캔하면, 점검원의 위치와 점검 시간이 시스템에 꽂힌다. 약속시간에 맞게 도착했는지, 충분히 머물다 떠났는지, 할당량을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가 실시간으로 기록된다.
이처럼 본사의 철저한 감시 아래 일하지만, 신씨는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다. 하청구조의 밑바닥에서 1년 단위 계약으로 연명하는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다. 피고용자이면서도 신분은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의 경계 안에 포섭되지 않는 방문점검원들의 불안한 일터를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따라가 봤다.
‘매니저’라 불리는 방문점검 노동자들은 가전사에서 ‘렌털 서비스’로 제공하는 정수기, 공기청정기, 청소기, 스타일러 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관리한다. 소모품인 필터와 관을 교체하고, 기기를 살균 소독하는 등 여러 일을 도맡는다. ‘LG’라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계약은 하청업체인 하이케어솔루션과 맺고 있다.
점검원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방문하는 가정은 평균 150곳가량. 건당 수수료가 9,000원이니 월급은 150만 원이 채 안 된다. 수수료는 11년 전 가격에 머물러 있다. 4년차 매니저 김정원(56)씨는 “동료들끼리 농담으로 그래요. LG에 자원봉사하러 다닌다고. 최저시급에도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이니까”라고 말했다.
‘매니저’라는 번드르르한 직함 뒤에 도사린 현실은 초라하다. 모집 공고엔 ‘차량 있는 여성을 우대한다’고 적혀 있지만, 자기 소유 차량이 없으면 아예 이 일을 할 수 없다. 10kg에 육박하는 장비를 들고 ‘뚜벅이’로 걸어 다닐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유류비와 보험료 등 차량 유지비는 모두 본인 부담이다. 각종 비용을 덜어내고 나면 손에 남는 건 월 100만 원 남짓. 하다못해 주차비까지 매니저의 주머니에서 나간다.
이유는 하나,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육아와 가사를 병행할 수 있는 선’에서 일할 수 있기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실제로 이들은 ‘육아와 가사를 병행할 수 있을 만큼' 한가롭게 일하고 있을까. 각각 10세, 8세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3년차 매니저 주단비(36)씨는 이렇게 말했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서 오후 8시에 들어와요. 오후 3시쯤 하교한 아이들 간식 먹이고 학원 보내느라 한 시간 정도 집에 들르는데, 아이 돌봄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이때가 전부죠. 고객과 방문 시간을 조율하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출동해 해결하는 것까지 다 저희의 일이라 잔업이 늘 쌓이거든요.” 식사는 거르거나, 대충 차 안에서 허겁지겁 때우기 일쑤. 고객들이 자기 집 화장실 쓰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해 볼일조차 참아야 한다. 점검원 10명 중 8명 이상이 만성적으로 방광염을 앓을 정도다.
방문점검 노동자들은 한마디로 ‘24시간 대기조’다. 콜센터는 오후 6시면 종료되지만, 고객들은 밤 늦은 시간에도 매니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주씨는 지난 추석, 고객의 전화를 받고 본가가 있는 울산에서 김해로 부랴부랴 달려가야 했다.
이 집과 저 집을 이동하는 시간엔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날 방문할 고객에게 안내전화를 하며 운전한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차를 몰다 접촉사고로 이어진 순간도 적지 않다. “사고가 나도, 당장 내 몸 아픈 것보다 뒤에 고객들이 기다릴까 봐 전화부터 돌리게 되더라고요. 약속을 어기면 바로 컴플레인이 들어가고, 결국 그 책임은 모두 제가 져야만 하니까요.” (김정원 매니저)
노동자처럼 일하고, 책임은 대표처럼 진다. ‘자유롭게’ 일하는 개인사업자라 불리지만 이들은 회사에 철저히 종속된 노동자와 한 치도 다름이 없다.
“한때는 저희가 영업도 했어요. 간단한 수리는 수리기사를 따로 부르지 않고 저희가 직접 하기도 했고요. 이게 다 무료노동이었죠.”(신현정 매니저) 매니저 역시 ‘LG의 가족’이니 ‘그럴 의무’가 있다는 논리다. 영업 강요는 노조를 만들어 대응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아쉬울 땐 ‘가족’을 운운하더니, 책임져야 할 땐 ‘객식구’ 취급을 했다.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한 날에도 매니저들은 쉴 수 없었다. 회사의 조치라고는 ‘백신 접종으로 인한 점검 일정 조정에 협조해달라’는 안내 메시지를 고객들에게 전송한 게 전부였다. 정부가 권고한 유급 휴가는커녕 무급으로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오전 9시 반까지 근무하고 10시에 백신을 맞았는데, 점심 먹고 바로 또 현장에 나갔어요.”(주단비 매니저)
심지어 일하는 도중에 성범죄 피해를 당해도 마땅한 조치가 없다. ‘다시는 그 집에 못 가겠다’고 호소해도, 팀장을 대동해 들여보낸다. 남성 고객이 속옷만 입고 나오면 어떻게 대처하냐고 물으니,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남겨 오라’는 황당무계한 답변이 돌아왔다. 3년차 매니저 김소영(37)씨는 “회사는 피해자인 매니저들만 단속했다"며 "‘최대한 고객님이 불편해하시지 않게 구슬려서 넘어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면, 애는 누가 보고 집안일은 누가 하냐. 고객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에요. 심지어 제 남편을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맞벌이 부부가 육아나 가사를 나눠서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남자 쪽이 힘들겠다’고 말씀하시죠.” (김소영 매니저)
고객에게 밥 먹듯 당하는 호구조사는 ‘그러려니’ 한다. 가장 힘든 건 회사도 여성 노동자들을 ‘반찬값 벌러 나온 아주머니’나 ‘용돈벌이 나선 주부’ 정도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장인 분들이 꽤 많아요. 이 급여 가지고는 사실 생계유지도 힘든 상황이거든요. 관리자들은 속 편하게 ‘매니저님들은 다 주부신데, 그 정도 받으셔도 보탬은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신현정 매니저)
여성 노동은 언제나 ‘덤’ 취급을 당한다. ‘여성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일이 된다. 신씨는 앞서 코웨이에서 7년 동안 정수기 점검원으로 일했다. 당시에도 특수고용직이었고, 10년이 지나 회사를 옮긴 지금도 여전히 특수고용직이다. 정수기 관리엔 도가 텄을 정도로 숙련자지만, 건당 수수료엔 거의 차이가 없다.
자기 소유 차량을 이용하는 ‘방문 노동자’라는 점에선 수리기사와 다를 바가 없지만, 처우는 다르다. 수리기사는 본사에서 직접 고용한 ‘정규직’이다. 설치기사의 경우 건당 18,000원씩 수수료를 받으며 유류비 등을 지원받는다. 그에 비해 기기 관리 전반을 책임지고, 간단한 수리 업무까지 해내는 매니저들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다.
방문 점검원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10년 전 수준에 그쳐 있는 건당 수수료를 인상하고, 성범죄 예방대책을 세워 일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선 ‘개인사업자’가 아닌 노동자로서 회사와 마주 앉아야 한다.
정부는 이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회사는 불복 중이다. 지난해 7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LG의 방문점검 매니저들을 ‘노조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측(하이케어솔루션)은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금속노조 LG케어솔루션 지회의 교섭 요청에도 불응하고 있다.
LG전자 생활가전의 렌털사업은 공격적인 점유율 확보를 통해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매분기 매출 기록을 갈아치우며 연매출 7,000억 원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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