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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기로 한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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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우선 미안해. 답장을 어떻게 할지 막막하더라. 그동안 한 말 취소할게. “이런 건 어떻게 참는 거예요? 그런 질문과 저런 말들 폭력 아니에요?” 이렇게 묻는 네게 줄곧 내가 말했잖아. “그냥 ‘흐흐흐’ 하고 웃어 드려. 어차피 네 뜻이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니까.” 내 딴엔 최선이었거든. 누구도 불편하지 않게, 내 어떤 에너지도 더 빼앗기지 않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 최선.
“정말 모르겠어요. 어떤 매일을 살면, 저렇게 과거에 멈춰 있는 거지? 거기도 그래요?” 입만 열면 뒤처진 감수성과 스스로의 못됨을 전시하는 누군가가 견디기 어렵다는 네게 그런 무시와 회피가 유용하기를 순진하게 바랐거든. 그런데 이제야 알아채기 시작한 것 같아. 모든 부조리는 비록 먼 한 구석에서였을지라도 내가 웃어 넘겨 온 그 시간 속에 더 단단해졌다는 것을. 더 정색하고, 더 외치지 않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다 순진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무려 2021년. 유력 정치인들의 입에서 매번 노동자, 마이너리티, 여성, 외국인 비하가 쏟아져 나오는 게 힘들다는 말엔 나도 같이 화가 났어. 하지만 더 큰 고통은 그게 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에서 온다는 말에는 죄책감이 스미더라. ‘예민하게 굴지마’, ‘정의로운 척하지 마’, ‘지겨우니 유난 떨지 마’라는 말들을 고스란히 웃어 넘긴 내 시간이 선연히 떠올라서 말이야. 두 세계의 이 깊은 골짜기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감수성 격차ㆍ괴리ㆍ분단. 어떤 말이 어울리든 그건 내가 일조한 비극이라는 거지. 끼인 세대의 원죄랄까.
변명이랄까. 나도 이유는 있었던 것 같아. 약자에게만 쉽게 질러대는 윽박, 공적 공간에서 쌍시옷을 연발하는 무례, ‘쟤들은 저래서 안 돼’라는 차별, ‘자꾸 분위기 흐리지 말고 세상을 넓게 보라’는 억압, ‘이런 것도 문제인 줄을 다 어떻게 아느냐'는 항변. 그 안에서도 웃어 넘길 핑계는 수두룩하더라고.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안온한 창살을 흔든다고 미워할까 봐. 후배 세대에 아부하는 줄 아는 오해가 괴로워서. 조직 융화력이 떨어진단 편견까지 덧댈 순 없으니까. 그것만 빼면 나쁜 분은 아니니까. 이걸 꼭 내가 틀렸다고 해야만 알까. 내가 뭐라고. 결론은 핑계가 많았지.
차별이라고 늘 엄숙하고 절대적인 자세로 대하는 게 맞냐는 고민도 우리 했었잖아. 세상을 표백이라도 하려는 듯 완벽하려다 모두가 침묵하는 것보단, 잘못한 만큼만 지적하고 알아채고 함께 배워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이야. 더 나은 방향으로 실패하기. 자주 망설이게 되더라고. 느리디 느리게 깨닫고 만 거지. “그래도 웃어 넘기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있잖아. 낙관은 진짜 불치병인가. 그렇게 쓴맛을 보고도 난 사실 희망의 증거들을 계속 봐. 날이 갈수록 묵묵히 뚜벅뚜벅 걷는 일상의 행동가들을 더 자주 더 멋진 방식으로 마주치게 된달까. 요즘 내가 과몰입했다는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 무대도 마찬가지야. ‘세상의 모든 별종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난 단순히 도톰한 엉덩이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프로페셔널들의 행보에 살짝 눈물도 나더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빌려 이렇게 숨쉬듯 덤덤히, 때론 열정적으로 하고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하는 이들의 존재가 고마워서.
오해는 마. 그렇다고 또 슬며시 웃겠단 말은 아냐. 무시ㆍ모면ㆍ회피만 가지고 모든 걸 견뎌나가려고 했다간, 2027년 대선 국면도 꼭 오늘 같을 테니까. 나도 이렇게 다짐할게. 웃지 말자. 다물지 말자. 그래도 미리 또 미안하다. 아마 몇 번쯤은 다시 슬며시 웃고 말 거라서. 내놓겠단 다짐이 겨우 웃지 않는 것이라서. 그래도 이렇게 한 발씩 나아가자. 그렇게 바뀐 자리에서 마음으로부터 즐거울 때 비로소 함께 웃자. 냉소적 가짜 미소 말고 진짜 대차고 뜨거운 웃음으로 깔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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