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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또는 매트릭스 ①한국어는 누구의 것인가

입력
2021.10.21 20:00
2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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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학과 조교에게 혹시 아는 게 있는지 물었다. ‘무슨 신문사 기자인데요, 국어 파괴 현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분이 없냐고 해서, 제가 선생님 연구실 전화번호 알려줬습니다.’ ‘국어 파괴요?’ ‘네. 한글날 관련해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고 해서요.’

‘한국어는 좀 파괴돼도 됩니다.’ 깜짝 놀란 조교가 말을 못 잇고 머뭇거렸다. ‘네?’ ‘외래어가 문제라느니, 한글 파괴 현상이 심각하다느니, 이상한 신조어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 된다느니 온갖 걱정들을 다하지만, 한국어는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뭔가 떨떠름한 톤으로 조교가 대답했다. ‘아, 네.’

그 기자는 내 얘기를 토핑처럼 쓰고 싶어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으로 한글날 기사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있다. ‘모 교수는 최근 언어 파괴 현상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거기에다 한국어는 좀 파괴돼도 됩니다라고 답했다면? ‘모 국문학과 교수, 국어 파괴를 주장’ 이런 기사가 나가고, 일파만파, 내 연구실 앞에 진보, 중도, 보수, 극우, 극좌가 연합한 100만 명이 운집하여 시위를 벌인다. 나 하나로 대동단결하는 세상이라. 이렇게 나는 상상 속에서 신성모독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벌써 7년도 더 된 이야기다. 지금도 한글날 즈음만 되면 국어 파괴를 걱정하는 기사들이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온다. 그리하여 이상하게도 10월만 되면 한국어는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관은 모두 국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만들어진 현상이다. 0과 1이라는 두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는 달리 이 국어 매트릭스는 1과 3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국어는 이 성스러운 삼각형 위에 세워진 상상의 발명품이다. 이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강원도 정선에 사는 사람이든, 마라도에 사는 사람이든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말을 사용할 것으로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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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라고 했지만 국어라는 매트릭스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단단한 실재이자 자명한 사실이다. 당신이 한국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한국 영토 안에서는 다른 한국인들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저기서는 ‘바럼’, 여기서는 ‘보롬’이라고 하지만 매트릭스는 우리 모두가 ‘바람’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강력한 환상을 심어준다. 국정 역사 교과서처럼 국가가 제시하는 단일한 역사에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국가가 정해주는 ‘단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않는 이유다.

국어의 파괴와 오염을 우려하는 시선에는 순수한 삼각형을 수호하려는 열망이 숨어 있다. 순정한 국어에 대한 위협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국어’만의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고쿠고(國語) 개념을 확립시킨 우에다 가즈토시는 고쿠고가 일본인의 정신적인 혈액이고, 일본의 국체는 이 정신적인 혈액으로 유지된다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 실망스럽겠지만 한국어의 ‘국어’라는 개념은 일본 ‘고쿠고’의 DNA를 상당 부분 물려받았다.

국어라는 매트릭스는 순수를 열망한다. 이 열망을 실현하는 방법은 오염의 제거이다.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는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단호히 제거되어야 한다. 통상 이런 청소의 대상은 ‘오염’된 언어이지만, 때로는 사람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70년 전 제주에서 이런 오염을 제거하는 작업이 있었다. 4·3시기의 제주. 섬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파견된 토벌대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제주도민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어로 소통하거나, 심지어 통역관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는 성스러운 삼각형의 도식을 깨는 일이었다.

오랜 기간 4·3을 취재한 기자이자 4·3 연구자인 허호준은 이렇게 주장한다. 일본어로 소통하는 것이 제주인들을 이민족으로 인식하게 했으며, 이것이 제주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기제로 작용하여 대량학살을 촉발한 원인이 되었다고. 같은 영토 안에,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그래서 뭔가 다른 민족처럼 보이는 불순한 사람들. 이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삼각형의 순수는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제주말은 정녕 오염된 것이었을까?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안온하다. 이 세계 안에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는 빨간약을 권하고 싶다. 숫자 1과 3으로 이루어진 매트릭스 안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빨간약을 먹었다면, 당신은 많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 ‘한국어는 누구의 것인가?’


한글날을 앞둔 7일 대전 중구 이주외국인종합복지관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이주 여성들이 직접 쓴 한글을 보이고 있다. 뉴스1

한글날을 앞둔 7일 대전 중구 이주외국인종합복지관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이주 여성들이 직접 쓴 한글을 보이고 있다. 뉴스1


한국어는 누구의 것인가? 여기 2만 명의 미등록 아동들이 있다. 한국에서 자라나 한국어를 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 그러나 ‘서류에 기록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만약 당신이 이 아이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이유는 ‘국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이 아이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당신은 은연중에 이 아이들을 ‘하나의 민족 = 하나의 영토 = 하나의 언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 재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위일체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야 하는 아이들. 그 믿음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들의 한국어는 누구의 것일까? 이 아이들에게 한국어는 허용되지 않아야 했을까? 이 아이들을 자신들의 언어가 사라진 곳으로 추방하는 것은 학살인가 아닌가?

모어가 한국어가 아닌 이주민들의 한국어는 어떠한가? 이주민들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한국어를 자신들의 두 번째 언어로 받아들여 학습한다. 그러나 그들의 한국어는 한국 사회에서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애써 배운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주민들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반말과 폭언이기 일쑤다. 관공서에서 일을 처리할 때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빠르고 수월하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이주민들의 한국어를 ‘한국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어라는 매트릭스 논리 속에서 이주민들은 애초에 ‘국어’를 가질 자격이 없다. 더군다나 이주민들의 한국어는 순수한 결정체인 ‘국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국어매트릭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주민들의 한국어는 위생학적으로 오염되었으며,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것이다. 이윽고 한국인들은 이 ‘오염’과 ‘열등’의 이미지를 이주민들의 속성으로 전이시킨다. 이것이 이주민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반말을 하는 까닭이다. 매트릭스 속에서 한국인들은 무의식중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의 한국어를 빌려다가 쓰는 주제에 저렇게 엉망으로 사용하다니. 저건 한국어가 아니야. 미성숙한 존재들인 이주민들은 한국어를 가질 자격이 없어.

사람들은 상상의 규범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말을 한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통할 수만 있다면 임시방편의 말이든 뭐든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가다 사용한다. 그 과정을 보고 파괴니, 오염이니 하는 딱지를 갖다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그런 파괴와 오염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면서 만들어졌다. 이주민들의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이주민들도 그저 살기 위해 한국어를 사용한다. 이들의 한국어는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한국어의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고 있다. ‘바르고 고운’ ‘우리말’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삐뚤빼뚤 엉성해 보이는 한국어지만, 그것은 엄연한 삶의 언어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어는 당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주민들의 한국어는 이 땅, 그리고 이 땅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한국어 변종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어는 누구의 것인가? 아무 망설임 없이 한국어를 ‘우리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더 많은 ‘우리’와 더 많은 ‘한국어’를 상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어라는 매트릭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자, 여기 빨간 약과 파란 약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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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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