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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맞았다고 장풍 나가는 건 아닙니다만

입력
2021.10.2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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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대회의실에 마련된 찾아가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센터에서 시장종사자가 얀센 백신을 맞고 있다. 뉴시스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대회의실에 마련된 찾아가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센터에서 시장종사자가 얀센 백신을 맞고 있다. 뉴시스


오늘로써 투명 인간, 즉 접종 완료자가 됐다. 광클릭보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얻어걸린 쪽이다. 급히 맞다 보니 미리 잡아둔 약속도 취소하기 뭣해 그냥 나갔다. 앉은 자리에서 술도 몇 잔씩 했다. 접종자의 자세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막상 끝나니 좀 싱겁다. 해열제와 체온계를 옆에 두고 아프고야 말리라고, 그것도 기어코 주말을 끼고 아파 버리리라 다짐을 했건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온몸이 금강불괴가 되어 이 세상 병균들을 방탄강기로 다 튕겨낼 것 같지도 않다. 급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떨리는 걸 보면.

이런저런 자리에서 백신의 효과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문재인 정권이라 멋모르는 노인네들에겐 싸구려에다 효과도 없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잔뜩 맞혔다는 우측 태극기 유튜브 같은 소리에서부터,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거대 백신 자본의 손아귀에 전 세계가 놀아나고 있다는 좌측 자연사랑 근대초월론자들의 투덜거림까지.

이들의 고정 레퍼토리는 하라는 방역 다 하고, 맞으라는 백신 다 맞았는데,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냐는 푸념이다. 그럴 땐 그래도 우리 정도면 상당히 성공한 케이스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 말마저 하기 귀찮을 때면 그저 “백신 맞았다고 손에서 장풍 나가는 건 아니에요”라며 씩 웃고 만다.

‘면역에 관하여’(열린책들)라는 책이 있다. 코로나19 사태 훨씬 이전,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인 사람이 쓴 책이다. 자신이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혹시 백신이 내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움 속에서 면역과 백신을 스스로 공부해나간 기록이다.


서양엔 신념을 지닌 백신 반대론자들이 많다. 백신면역보다 자연면역이 좋다며 수두파티를 여는가 하면, 백신 종류별로 이건 맞고 저건 안 맞고 구분하는 이도, 백신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실험대상 취급당했던 역사 때문에 백신에 대한 불신이 강한 흑인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체육 면에는 해외 흑인 스타선수들이 코로나19 백신을 거부해 논란이라는 기사가 종종 나온다.

인상적인 건 이런 현상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다. 역사적 악몽 때문에 그들이 백신을 기피한다면, 좋은 집에서 나고 자라 좋은 교육과 좋은 직장을 누리고 있는 우리 백인 중산층 사람들이, “우리 계급 사람들이” 더 열심히 백신을 맞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라도 열심히 맞아 집단면역을 만들어야 이런저런 이유로 백신을 꺼리는 이들까지 보호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저런 게 미국의 힘인가 싶어 마음속이 적잖이 몽글몽글해졌다.

장장 2년여에 걸친 코로나19 사태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한다. 거창한 승전보는 없다. 굳이 승자를 고르자면 인간보다는 바이러스 쪽일 것 같다. 인간 입장에서야 ‘그래, 이 정도면 버텨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수준이다. 장풍 쏘게도 못 해주는 백신의 효능이란 딱 거기까지다.

서양과 달리 우리에겐 신념을 가진 백신 반대론자는 없다. 그 덕에 성인 접종 완료율 90%도 달성할 기세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우린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냈다.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자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백신을 꺼리는 미접종자들에게도, 또 백신 접종으로 피해를 봤다는 이들에게도 조금 더 너그러워질 것 같아서다.

조태성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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