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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vs. 자발적 성매매'의 프레임을 넘어서

입력
2021.10.14 15:30
15면

편집자주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됐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모색한다, 공존’은 다름에 대한 격려의 길잡이가 돼 줄 책을 소개합니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지난 8월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에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뉴스1

지난 8월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에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뉴스1

1921년, 동네 빵집에 딸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이 가난해진 탓에 그는 열일곱의 나이로 기생이 되었다. 성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유곽에 창기로 팔려갔다. 빚을 빨리 갚기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집안의 빚은 계속 늘어났고, 전쟁터를 옮겨다니는 와중에 유곽 주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어 전쟁이 끝나고서야 귀국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시로타 스즈코는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증언한 유일한 일본인 '위안부'다. 2000년 도쿄법정이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는 일본 사회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는 '강제동원 vs. 자발적 성매매'라는 프레임이 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논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강제 동원된 식민지 '처녀들'과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간 일본인 성매매 여성들이라는 구도도 포함되었다. 공창(公娼)에서 일하던 일본인 여성들이 목돈을 받고 자원한 것과 달리 대규모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은 나이 어린 순결한 처녀가 다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일본인 '위안부'는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국가와 사회는 "나라에 도움이 된다" "야스쿠니에 모셔진다"며 여성들의 애국심에 호소했지만, 전후 보상 문제에서 일본인 '위안부'는 제외되었다.

일제강점기 인천과 부산에 들어선 일본식 집창촌 '유곽'. 논형 제공

일제강점기 인천과 부산에 들어선 일본식 집창촌 '유곽'. 논형 제공

'일본인 '위안부''는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일본인 '위안부'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 공창 제도와 연계된 성매매 산업에 있으며, 이를 전쟁에 동원한 가부장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책임을 명시한다. 송연옥은 부산, 원산 등에 이식된 공창제가 광범위한 인신매매 경로를 만들었고, 이것이 폭력적인 '위안부'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오노자와 아카네는 군과 국가가 공창업자나 제대 군인, 군에 출입하는 상인 등을 통해 목돈을 사전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여성들을 유인했다며 '자발적 동원'의 함정을 폭로한다. 당시 이미 국제법상(여성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1921)) 금지되었던 인신매매가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인 여성들이 돈을 더 많이 받고 계약 조건이 좋았던 반면, 조선인 여성들은 더 어리고, 열악한 지위에 놓여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을 옭아매고 있는 '자발적 성매매'의 올가미는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군표를 모아 우편환으로 바꾼 조선인 '위안부'의 사례를 강조하면서 '위안부'는 공창제라며 강제 동원을 부정한다. 이는 역으로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의 관계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창제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지원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핵심 기제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성노예제는 없었다'고 말할 근거가 사라진다. '강제 동원 vs. 자발적 성매매'라는 대결 구도에 갇혀 강제성과 자발성을 구분 짓는 것은 역사 수정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프레임이 말하지 못하게 한 피해자들, 이 프레임이 숨기고 있는 국가와 시장의 효율적인 위탁 관계, 시장과 가부장제의 오래된 유착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1924년 태어난 김학순은 15세가 되던 해 의부에 의해 기생집 수양딸이 되었다. 춤과 노래를 익혔으나 나이 제한으로 인해 조선에서 일할 수 없던 김학순은 17세에 중국으로 갔다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가난과 성 산업, 군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창제 제도가 그를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었다. 가난 때문에 팔려갔던 여성들에게 너의 피해를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역사 부정의 목소리는 강제 동원을 아주 좁은 의미로 해석하며, 김학순을 비롯한 여러 이름을 거론한다. 머리채를 잡혀 논밭에서 끌려간 것만 강제 동원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는 일본인 '위안부'들을 말할 수 없게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이 지났다. 지금부터라도 강제 동원과 자발적 성매매를 둘러싸고 촘촘하게 얽혀 있는 국가의 여성 동원과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일본인 '위안부'·니시카와 미유키 외 지음·번역공동체 잇다 옮김·논형 발행·296쪽·1만9,800원

일본인 '위안부'·니시카와 미유키 외 지음·번역공동체 잇다 옮김·논형 발행·296쪽·1만9,800원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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