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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내내 전화만 받는데... 긴장의 끈 놓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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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한국일보>
곳곳에 산불이 나서 아수라장인 로스앤젤레스. 모종의 사고를 일으킨 경찰 조는 잠시 911 긴급신고센터로 좌천됐다. 내일 재판을 앞두고 있고, 가족과는 별거 중이고, 화재로 공기가 나빠져 천식이 심해지는 최악의 상황에서 심야 근무를 하는 조.
한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이름은 에밀리. 다급하게 통화를 하는 에밀리에게 물어보니 고속도로에 있고, 폭력적인 전남편에게 납치를 당한 것 같은 상황이다. 조는 고속도로 순찰대에 연락해 에밀리가 탑승한 밴을 찾는다. 하지만 화재 때문에 밴의 색깔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결국 순찰대는 에밀리를 찾지 못한다. 에밀리의 집으로 전화를 하자 6세인 애비가 받는다. 동생과 함께 있다는 애비의 말에, 경찰을 집으로 보낸다.
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위기에 처한 이들의 전화를 받고, 경찰과 고속도로 순찰대 등에 연락을 취하는 것뿐이다. 범죄 상황이 분명하다고 조는 믿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만큼 절박하지 못하다. 아마도 에밀리, 애비와 직접 통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짐작한다면 저렇게 태연하지 못할 텐데. '더 길티'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공간을 이동하지 않는다. 조가 전화를 받는 긴급신고센터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아니 바깥에서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카메라는 오로지 신고센터에 있는 조의 상황만을 보여준다. 우리는 조의 행동 그리고 생각을 유추하여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더 길티'는 2019년 만들어진 덴마크 영화, 동명 작품의 리메이크작이다. 내용은 거의 똑같다. 전화를 받은 주인공이 사건을 유추하고 대응책을 마련하지만, 결과는 그가 예측한 것과 전혀 달랐다. 제한된 혹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거대한 사건, 세계를 구성할 때는 대단히 신중해야 하고, 반드시 검증과 회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더 길티'는 제한된 공간에서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대단한 박력의 영화였다. 리메이크작 '더 길티'도 마찬가지다.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시종 궁금하게 한다. 조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구체적인 사건의 상황을 볼 수 없어 답답하고 그러면서 더욱 빨려 들어가게 된다. 다만 원작을 봤다면 긴장감은 떨어질 수 있다. 이미 반전과 결말을 다 알고 있으니까.
리메이크작인 '더 길티'의 중심은 조를 연기한 배우 제이크 질렌할이다. 개인적으로 처한 상황만도 절벽 위에 홀로 선 기분일 텐데,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에밀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납치 사건이 분명함에도. 그래서 혼자서 화를 내다가, 에밀리와 애비에게 연민을 느끼다가, 해결할 방법을 찾아 골몰히 생각하다가, 모든 것이 엉클어진다. 조는 혼자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처리해야 한다. 에밀리도, 파트너인 릭도, 아내도 모두 전화를 통해서만 그와 이야기한다. 행동은 그들에게 맡겨야만 한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조는 무기력하다. 신고센터에 앉아서는 에밀리를 구할 수 없다. 엉망진창의 암울한 상황을 제이크 질렌할은 혼자만의 연기로 모두 표현한다. 시청자가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영화 초반부터 조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지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아내와 전화를 하는 조를 보면서, 별거 상태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내일 재판에서 이겨야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이후에 알게 된다. 초반에는 약간 신경질적이고 화가 많은 사람 정도로 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조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진다. 에밀리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해도, 조의 반응은 거의 집착과 분노 조절 장애에 가깝다. 현장에서 범인을 잡고 에밀리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멀리 갔다. 점점 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조는 악인이 아닐까? 아니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지만 분노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충분히 악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닐까?
제이크 질렌할은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탁월하게 드러내는 배우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영화는 '도니 다코'였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알게 되고, 기꺼이 희생을 선택하는 고교생. 제이크 질렌할은 진지하고, 순수했다. 이후 도니 다코는 드니 빌뇌브의 '에너미',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 댄 길로이의 '나이트 크롤러', 톰 포드의 '녹터널 애니멀스' 등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가치로 판단하기 힘든 복잡하고도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순수와 열정과 강박과 집착과 분노와 불안 그리고 파괴의 욕망을 하나의 캐릭터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심지어 슈퍼히어로물인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미스테리오도 그런 캐릭터였다. 제이크 질렌할은 선해 보이지만 섬뜩한 광기가 내비치는 인물을 잘 연기하는 배우다. 상처 입은 순수한 영혼을 연기하는 것도 너무 잘하고.
'더 길티'는 제이크 질렌할의 드라마틱한 연기를 보는 것도 좋고, 마지막의 반전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 조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를 통해 묵직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더 길티'는 편견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조가 얻는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 조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오로지 전화를 통해서다. 그리고 현장에 간 경찰들이 말해주는 정보가 더해진다. 조는 에밀리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마련한다. 에밀리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한된 정보를 통해 조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라면.
조와 릭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브리오나 테일러 사건이 떠올랐다. 2020년 5월,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이 플로이드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목을 눌러 사망하게 한 사건. 2020년 3월, 루이빌에서 용의자로 오인하여 집에 들이닥친 경찰과 남자친구가 총격을 벌이다가 비무장 상태의 테일러가 8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 둘 다 흑인이었고, 무고했지만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명백히 경찰의 월권이고 살인이었지만, 브리오나 테일러 사건의 가해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 미국의 많은 이들은, 법과 정의는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 엘리트와 일부 집단만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시스템이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도, 세계 전체가.
'더 길티'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선입관과 편견으로 만들어진 허상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의 인식은 때로 허약하다. 별다른 근거 없이 또는 잘못된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릇된 신념을 추종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세상은 아수라장이다. 표면적으로는 화재 때문이지만, 실제로 불타는 것은 세상 전체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무엇이 죄이고, 정의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아마도 조는 오발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무기가 없는데도 발포했거나, 위급상황이 아닌데도 총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파트너인 릭에게 재판에서 위증을 해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니까. 조는 자신이 옳고, 자신이 희생자라는 틀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직장도, 가족도 아마 친구도,
하지만 변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만 하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조는 그렇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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