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부모 뽑기 '오야가차'에서 꽝이? 한국 흙수저와 닮은꼴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자주 회자되는 ‘오야가차(親ガチャ)'라는 말이 있다. 부모를 뜻하는 ‘오야 (親)’ 에, 장난감 캡슐을 자동판매기에서 무작위로 뽑는 게임을 지칭하는 ‘가차 (ガチャ)’ 가 붙어 ‘오야가차’다. 우리말로 ‘부모 뽑기 게임’ 정도로 옮겨지는 젊은이의 은어다. 부모를 뽑기 장난감에 비교하는 표현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은 “오야가차에서 꽝이 나왔다 (親ガチャに外れた)” 라는 식의 자학적 뉘앙스로 자주 쓰인다. “부모를 잘못 만난 턱에 인생이 꼬였다”고 한탄하는 풍자인 것이다. 뽑기 게임의 승패는 오로지 운에 달려 있다. 모두 선망하는 ‘레어템’을 뽑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몇몇 운 좋은 아이들뿐, 대다수의 아이들은 흔해빠진 변변치 않은 장난감을 뽑고 자신의 불운을 탓한다. 뽑기 게임에서처럼 부모는 선택할 수 없는 존재다. 부유한 부모를 ‘뽑은’ 소수의 누군가는 유복한 인생을 살고, 보통의 부모를 ‘뽑은’ 대다수의 누군가는 그저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혹은 누군가는 지독히 가난하거나 문제투성이인 부모를 ‘뽑은’ 탓에 인생 초반부터 고생길의 연속을 견뎌야 한다. “부모를 잘 ‘뽑아야’ 인생이 술술 풀린다”는 젊은이들의 풍자에는 빈부 격차가 갈수록 고착화되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서려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도 일맥상통하는 말이 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수저계급론’이다.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금수저, 가난한 부모를 만나면 흙수저다. 금수저는 부모들의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에 힘입어 수월하게 교육, 입시, 취업, 결혼 등의 관문을 통과하고, 덕분에 비교적 쉽게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다. 이에 비해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흙수저는 어렸을 때부터 매사에 불리하고 고달프다.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개척해야 하니 성공으로 가는 길도 험하다. 부모의 부와 지위가 후손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니, 대다수의 보통 사람에게는 힘이 쭉 빠지는 이야기다. 물론 금수저라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피나는 노력 끝에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린다는 흙수저의 성공담도 종종 들린다. 하지만 그런 결과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장 눈에 빤히 보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대학 서열 1위라는 도쿄대 입학생의 부모 중 고소득 세대의 비율이 동 세대 평균의 두 배라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국립대라서 비교적 학비가 저렴한 도쿄대가 그 정도니, 학비가 비싼 명문 사립대는 말할 것도 없다. 부모의 재력이 없으면 응시할 수조차 없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부모들은 자녀를 초·중·고 과정부터 계열 학교에 입학시켜서 대학 입시까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다. 가정교사를 고용하거나 어렸을 때에 해외 유학을 경험하게 하는 등 사교육에도 정성을 들인다. 일본도 한국에 못지않은 학력 사회이기 때문에, 소위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엘리트 계층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빈부 격차는 그저 재력의 차이에 머물지 않는다. 교육 격차, 문화 격차, 정보 격차 등 불평등한 사회 환경을 다방면으로 확대시키는 힘이 있다. 이러니 오야가차라는 푸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 정계의 고질적인 세습 관행은 특히 사회 지도층에 오야가차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지역의 후원회를 물려받는 방식으로 국회의원 부모나 친척의 선거구를 승계하거나, 정치인 부모의 인맥을 활용해 일찌감치 경력을 쌓고 이를 기반 삼아 정치인으로 데뷔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이번에 새 총리로 선출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도 소위 ‘정치 명문가’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세습 정치가다. 정치가의 아들이 아버지를 본받아 정치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는 것까지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초고속 정가 입문의 길이 오직 그들에게만 열려 있다는 점에서 공정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무엇보다 가업을 계승하듯이 정치 권력을 세습하는 것은 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사명감과는 거리가 멀다. 국회의원의 세습 관행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관행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의 현역 국회의원 중 무려 3분의 1이 부모를 잘 ‘뽑은’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세습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불공정한 사회 구조에 분노를 느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감은 이전보다 높아진 것으로 조사되니 상황이 좀 묘하다. 예를 들어, 1980년대부터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해 줄곧 연구해 온 사회학자들의 모임인 청소년 연구회가 10년마다 조사, 발표하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0년대 젊은 세대의 생활 만족도는 9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2020년대의 조사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최근에 나온 다른 조사 결과에서도 젊은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다른 세대보다 높다. 사회적 환경이 불공정하다고 인식하는 데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만족도는 올라가는 모순적 상황이다. 한 사회학자는 “생활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자신의 노력이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애초에 낮기 때문에 크게 실망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젊은이들의 냉소적 담론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타고 난 운명 탓으로 치부하는 패배적 숙명론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태어날 때부터의 재능이나 용모를 타고난 운명이라고 야유하는 ‘재능 뽑기(才能ガチャ)’나 ‘용모 뽑기容姿ガチャ)’, 태어난 나라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나라 뽑기(?ガチャ)' 등 사회적 불평등이나 제도적 모순을 개인의 운명인 양 정당화하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 온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기성 세대는 젊은이들이 오야가차 운운하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합리화한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섣불리 젊은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득권 세력만 승승장구하는 제도의 모순이 젊은이들을 무기력한 삶으로 내몰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불공정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다. 일본의 기성 세대들에게서 사회적 모순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을 줄곧 느껴왔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입시나 취업 등에서 느끼는 현실적 어려움을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려 하지 않고,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개인적 고민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그런 면에서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제기한 오야가차 담론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일본 사회가 불공정성이라는 사회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다방면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논의는 그저 논의일 뿐 개선 방안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수저계급론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지도층 인사 자녀의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회의원 자녀가 부모 덕에 굴러들어온 특권을 마땅한 권리인 양 당연시하는 태도로 공분을 산다. 사회적 불공정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과제가 공론화된 지 오래지만, 앞장서서 이를 실천해야 하는 사회 지도층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기득권 계층에게 어떻게 개혁의 칼날을 들이댈 것인가라는 난제로 귀결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참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칼럼에서 언급한 일본 청소년연구회의 조사 결과는 藤村正之??野智彦?羽?一代編(2016) 『現代若者の幸福:不安感社?を生きる』(恒星社厚生閣)에 실려 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