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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을 거부한 유일한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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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많은 노벨상 시빗거리 중에도 가장 논란이 많은 게 평화상이다. 비핵 3원칙 공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탔지만 은밀히 핵무장을 추진한 사실이 들통난 전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용인하는 등 ‘힘의 외교’를 추구했지만 러·일전쟁 종전을 중재한 덕에 1906년 상을 탄 시어도어 루스벨트, 1979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중동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평화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극렬 시오니스트 총리 메나헴 베긴.
1973년 베트남 종전협정(파리협정)의 미국 대표로서 사실상 항복문서에 서명한 당시 백악관 안보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도 그해 평화상을 탔다. 하지만 당시 키신저의 회담 상대자로 공동수상자였던 북베트남 측 대표 레둑토(Le Duc Tho,1911.10.14~1990.10.13)는 “아직 조국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아시아 최초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역대 최초, 유일의 평화상 수상 거부자까지 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격과 원년 혁명가들의 영혼에 영예를 안겼고, 협상장에서 그랬듯 평판에서도 키신저를 압도했다.
북베트남 지역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딘성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기부터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했고,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립 멤버로 활약했다. 수차례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투옥-석방을 거듭하면서도 당 중앙위원과 정치국원 간부로 활동했다. 1969년부터 비밀리에 벌인 미국 측과의 강화회담 대표도 그였다. 그는 능란한 지연 전술로 전황의 우위가 공고해질 때까지 협상을 끌며, 반전 여론에 쫓기던 키신저를 농락했다. 그 과정에 쌍방의 수많은 병사와 시민이 희생됐지만, 그럼으로써 그는 사실상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훗날 키신저는 회고록에 “레둑토는 때로는 완강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협상 타결을 3년여간 지연시켰고,(…) 미국 언론에 모호한 말을 흘리면서 지연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곤 했다”고 썼다.
레둑토는 1986년 은퇴한 뒤 숨질 때까지 당 중앙위 고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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