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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절벽' 사태 피할 수 없었나

입력
2021.10.07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서울시내 은행 창구를 찾은 시민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뉴스1

서울시내 은행 창구를 찾은 시민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뉴스1

#연봉 8,000만 원을 받는 대기업 과장 A씨는 지난해 8월 뚫어둔 한도 1억 원의 마이너스 통장이 올해 연장이 안 될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다. 돈을 빌려 주식에 투자한 A씨는 지금 돈을 갚으면 손해를 보고 주식을 팔아야 해, 대출 기한이 다가올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은행은 손쉽게 그의 대출을 연장해 줬고, 그는 올해도 '빚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10년 만에 무주택자 신분을 벗어나는 직장인 B씨는 요즘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다음 달 이후 중도금과 잔금을 치러야 하는 데 깐깐해진 주택담보 대출 기준으로 주택 매입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저축은행 문도 두드려봤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B씨는 "신용도도 문제가 없는데, 바뀐 대출기준 때문에 사채를 써야 하느냐"며 정부의 대출 규제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은행권 대출 규제로 그야말로 난리다. 갑자기 높아진 은행권 대출 문턱 때문에 필요한 돈을 제때 못 구해 발을 구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집을 사려고 계약을 해놓은 사람들은 모자란 돈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돈을 못 구하면 계약금을 날리기 때문에 사채라도 쓰겠다는 사람도 여럿이다.

'대출 빙하기'라 불리는 사태가 온 것은 새로 취임한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가계 부채 증가율 억제를 제1의 목표로 내세우고 이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서다. 그는 급격히 불어난 가계부채가 우리 경제 최대 리스크가 될 수 있다며, 올해는 물론 내년까지 은행권 대출 문을 틀어 잠그겠다는 의지와 계획을 금융권 이곳저곳에서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몇 개월 전만 해도 연 소득이 넘는 마이너스 통장에 대해 쉽게 대출을 내주던 은행들이 최근에는 담보 물건이 있는 주택대출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대출 한도를 줄이고 있다. 단 몇 개월 사이에 금융환경이 크게 바뀐 것이다.

가계대출이 우리 경제 뇌관이 될 수 있고, 이제라도 대출 증가세를 잡겠다는 정부의 판단과 계획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투자하라고 연봉이 넘는 돈을 빌려주던 은행들이 어느 순간 집을 사겠다는 실수요자에게도 돈을 안 빌려주는 것은 문제다. 그동안의 은행권 대출 기준에 따라 자금 조달 방안을 짜고 이에 따라 집을 사는 등의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경제적 손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변한 국내 은행권 대출 창구를 보면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건물이 붕괴되거나 거대한 화재 방화벽이 닫히는 사이로 멋지게 슬라이딩을 해 재난현장을 탈출하지만, 그 주인공을 쫓는 악당은 그 슬라이딩을 제대로 못 해 목숨을 잃고 만다. 국내 은행 대출 창구에서는 일찌감치 대출을 해 빚투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 늦게 대출을 신청해 발을 동동 구르는 실수요자들은 '악당'과 같은 처지다.

대출 증가세가 심상치 않다는 경고는 사실 지난해 말부터 꾸준히 나왔었다. 지금의 대출 절벽 사태는 그러한 경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정부 책임이 크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출 증가세를 잡는 것 못지않게 애꿎은 피해를 보는 대출 실수요자들을 위한 보완 대책을 정부가 서둘러 내놓길 바란다.

민재용 정책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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