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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말한 대로 왜 안 됐을까

입력
2021.10.04 16:30
26면


"빨리빨리 결정하자" "속 터지고 열불난다"
채근하고 질책하고 매일 아침 토론했다는데
과도한 이념 접근, 능력 부족으로 성과 못 내

문재인 대통령이 1일 경북 포항 영일만 해상 마라도함에서 열린 제7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경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경북 포항 영일만 해상 마라도함에서 열린 제7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경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강민석씨가 회고록 ‘승부사 문재인’을 출간한 것은 이례적이다. 통상 정권이 끝난 뒤 펴내는 관례와 달리 임기가 8개월이나 남아서다. 아무튼 그간의 내밀한 사정을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강 전 대변인은 청와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대통령의 언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였다고 밝혔다. 그가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도 문 대통령은 “빨리 결정하자”는 말을 수차례 했다고 한다. 밖에서 알고 있었던 문 대통령의 스타일과는 딴판이었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와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결정은 ‘고구마’라는 별명이 상징한다. 대표적인 예로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충돌로 국정 전반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던 1년 동안 문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그때는 왜 ‘빨리빨리’가 안 됐을까.

강 전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정책 집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설적 표현을 써가며 참모들을 강하게 질책했다고 밝혔다. “한 번도 야물딱지게 한 적이 없다” “말아먹을 일 있습니까” ”재탕에, 삼탕에, 맹탕에” 마스크 대란 때는 “정말 속이 터지고 열불이 난다”고도 했다고 한다. 이런 설명에도 괴리감이 느껴진다.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은 부동산 문제다. 수십 차례나 부동산 대책을 쏟아냈으나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했다. 이 기간 대통령이 무용지물이 된 부동산 대책에 대해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을 꾸짖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작 육두문자를 쓰면서까지 질책해야 할 것은 부동산 문제 아니었나.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기자회견에서 “죽비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뒤늦은 후회를 남겼다.

코로나19 백신 공급도 마찬가지다. 강 전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백신 부족 문제가 불거지자 “오래전부터 청와대 회의에서 백신 물량 확보를 지시해왔다”며 관련 메모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 지시는 다른 국가들보다 한참 늦은 뒤였다. 일찌감치 대통령이 백신 부족에 대해 심각하게 질책했더라면 사정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유엔 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백신이 들어온 시기가 좀 늦어 초기 진행이 늦어진 측면이 있다”고 처음으로 시인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또 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참모들의 티타임이 4년여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됐다”는 강 전 대변인의 설명이다. 보통은 한 시간 이상, 길어질 때는 두 시간 넘게 국정 현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백신을 접종한 날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돌아오자마자 티타임을 진행했다고 했다. 이처럼 대통령이 매일같이 주요 정책 상황을 파악하고 점검했는데 왜 결정이 늦어지고 혼란이 반복됐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애써 토론하고, 서두르고, 질책했는데도 왜 박한 평가가 나오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무엇보다 국정 모든 현안을 이분법적 시각으로 재단한 것이 문제였다. 적폐청산, 검찰개혁, 최저임금, 일자리, 부동산 등 주요 과제에서 실용적 접근보다 이념적 편가르기에 치우쳤다. 리더가 핵심을 꿰뚫지 못하면 국정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갈등을 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곳에서는 물러서 있던 게 아닌가.

지금으로선 다음 대통령도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당수 유권자는 현 대선후보들의 자질과 역량은 거기서 거기라고 판단하고 오로지 진영에 유리한 후보를 선택한다는 입장이다. 누가 되어도 국민 절반의 반대를 안고 출발해야 하니 가시밭길은 피할 수 없다. 현 정치체제를 이대로 유지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다.

이충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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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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